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2)
우리는 이 긴밀한 사랑 안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서서,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몸은 통증 이후에야 비로소 인식된다. 아프지 않으면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성실하게 다 하고 있는 신체부위의 고마움을 알기 어렵다. 2021년의 나는 내게 허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는 내게서 많은 걸 빼앗아갔다. 실내 운동 시설 휴업 이후 5년을 유예한 ‘요요’와 필연적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원인을 찾다 보면 모든 게 원인일 수밖에 없는 수면장애. 나의 ‘에프코드’(정신과 질병은 F코드로 분류된다.)는 F510과 F320이다. 퇴근 후 자기 전까지 시간이 너무 많았다. 생각이 늘었고, 마음이 울적했고, 일주일에 일곱 번씩 술을 마셨고, 체중이 늘었고, 허리 디스크가 재발했다.
벌써 12년이나 회사를 다녔다. 야근을 심하게 하면 허리가 아파 계단을 오를 때 여지없이 통증이 느껴졌다. 스스로의 건강함에 대해 과신하던 나였다. 아파서 조금 쉬다 걸어야 할 때면 내 태만한 생활을 심판하는 통증에 패배감을 느꼈다. 허리가 유독 아픈 날이면 수영강습 후 자유수영 초급 레인에 가서 수면 위에 오래 누워 있었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팔만 휘휘 저어 어설픈 배영으로 25m를 돌고 나면 온화한 물이 내 방만한 현재를 감싸주는 것 같았다.
내 노동의 역사는 엄마에 비하면 일천하다. 대학을 다니며 한 과외 아르바이트가 오륙 년쯤. 직장생활이 올해로 12년.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은퇴 전까지 48년이나 일을 했다. 야근을 하느라 다리가 붓고 걷다가 허리가 울리는 날이면 엄마의 일을 생각했다.
"지겨워 죽겠네. 엄마는 이 짓을 어떻게 50년이나 했어?"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그저 웃는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 엄마. 중년 이후의 여성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엄마는 늘 육체노동을 했고, 운 좋게 비교적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 전까지 단기직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차마 내게도 다는 말하지 못하는 모욕을 여러 번 당했고, 무엇보다 여러 번 다쳤다.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함께 공공근로를 하던 동료들과 봉고차에 타다 잘못 닫힌 문에 손가락을 찧어 왼손 세 번째 손가락이 휘어져 있고, 창문 청소를 하다 의자에서 미끄러져 양 손목과 앞니가 부러져 수술을 하기도 했다. 브리지를 한 엄마의 앞니와 골절 수술 후 남은 양 손목의 철심 자국을 볼 때면 저 수술을 하고도 십 년이나 더 이어진 엄마의 노동, 그 긴 시간 앞에 숙연해진다.
2021년 1월이면 정년퇴직 예정이던 12월의 엄마. 엄마는 평소처럼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을 앞두고 열쇠를 반납하던 중 뒤쪽 구조물에 걸려 넘어져 척추가 골절되고 말았다. 사고 후 다음 날까지는 무난히 걸어 다니던 엄마가, 응급실에서도 MRI를 찍고 걸어서 퇴원한 엄마가 갑자기 새벽부터 허리 통증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아빠는 새벽 내내 어떻게든 엄마를 일으켜 세워보려고 했다. 엄마 혼자는 화장실도 가지 못해 아빠가 소변을 몇 번이나 받아냈다. 그 새벽 아빠는 공포에 떨었다.
엄마와 따로 살고 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음 날도 출근해 일을 했다. 늘 그렇듯 목요일 오전 회의를 마쳤고 여유롭게 오후 업무 내용을 점검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열두 시 정각에 걸려온 전화. (아빠는 내 노동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평소에도 업무 시간엔 절대 전화하지 않는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아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가... 엄마가 죽을 것 같아.”
아빠는 마음이 여리고 동정심이 많다. 아빠는 계속 울면서 엄마가 밤새 겪은 상황을 설명했다. 열두 시를 맞추어 정확히 정각에 전화를 한 아빠의 마음이 짐작이 돼 아빠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이대로 영영 걷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냐고 아빠는 말했다. 아빠는 시계만 보며 열한 시 반부터 혼자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놀라서 바로 안산 집으로 갔다. 누워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 엄마가 어설프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내 말에 엄마는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 아이구 또... 빨리 밥 챙겨 먹어. 천천히 먹어. 효선 아빠. 효선이 국물 줘.”
무작정 첫 진료 때의 MRI 촬영본을 받아 사설 구급차를 불러 ‘서울 큰 병원’으로 엄마를 옮겼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영영 걷지 못하게 될까봐 겁이 났다. 첫 사고 이후 십 년이나 더 엄마가 힘든 일을 하게 둔 나 자신이 너무 미웠고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혼자 밥벌이를 하고 혼자 살면서 내가 누렸던 모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다 엄마의 노동 위에 지어진 모래성 같았다. 사설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 때는 코로나 시국이었고, 입원실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 시도 끝에 운 좋게 밤 열 시에야 S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엄마는 무척 예민한 사람이다. 겁이 많고,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이런 엄마가 어떻게 그 많은 직장을 전전했을까.) 이전에 양 팔목이 부러졌을 때도 입원 후 꼬박 일주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예민한 엄마는 입원 후 자꾸 춥다는 말을 반복했고 모든 걸 토했고 이틀은 밥을 먹지 못했다. 엄마의 상태가 나빠 수술이 미뤄졌다. 엄마는 주말에 단감 몇 조각을 씹어 삼키고서야 겨우 살아나기 시작했다. 화요일 오후 골절상을 입은 엄마는 다음 주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골절된 부위에 의료용 시멘트를 붓는 수술을 했다. 대소변을 제대로 보지도, 씻지도 못한 채 엄마는 그 시간을 견뎠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자고 있는 엄마를 보면 아기 같고 안쓰러웠다.
나는 2020년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나를 구한 건 엄마와 아빠의 말이었다. 아빠는 약속 없이 일요일 오전 불쑥 내 집을 방문해 내 얘기를 한 시간 동안 조용히 들어주었다. 나는 울면서 내 힘듦에 대해 이야기했다. 와줘서 고마워. 내 말에 아빠는 아이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병원을 다니게 됐다는 말에 엄마는 무척 속상해했다. 그러면서도 더 크게 잘못되기 전에 잘 결심했다고 격려했다. 엄마는 말했다. 내 딸 착한 건 내가 안다고. 내 딸이니까 착하다고.
그때 나는 영화 <벌새> 속 ‘은희’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 성격 안 나빠.” 하면서 울부짖고 뛰어오르던 아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잘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의 그 말이 나를 살게 했다. 엄마는 나를 낳았고 또 몇 번이고 살린다.
엄마의 입원과 함께 일 확진자가 1천명을 넘나들며 코로나 19 3차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보호자 1인 외엔 병실에 머물 수 없게 규칙이 엄격해졌고, 아빠와 나는 늘 병원 후문 앞에서 출입증을 교환하며 교대했다. 마침 재택근무가 시작되었고, 노트북을 가져가 병실에서 근무를 하며 간호를 했다. 나는 수시로 일어나 엄마의 물을 챙기고, 소변통을 비웠다. 엄마는 병원밥은 잘 먹지 못했다. 엄마가 잘 먹는 단감을 깎고 매생이죽을 사러 나르던 길. 그 거리에서 듣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엄마와 나, 둘 뿐인 병실에서 누워 몇 시간이고 떠들면서 하던 엄마와 나만 아는 이야기들.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의 한 장면. 공장 일을 하러 서울로 떠나는 열여섯 주인공은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버스에 오른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지 못했다. 어머니와도 동생과도 같은 집에서 닷새 이상을 자지 못했다.” 이 문장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취업 후 캐리어 하나만 들고 엉겁결에 떠나온 집.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일주일씩 잠을 자는 건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병실에서의 시간이 내겐 무척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골반과 대퇴부, 장을 동시에 다치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몇 달이나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하고 심지어 재판을 했다. 엄마는 병원밥을 못 넘기는 예민한 나를 위해 매일 같이 집밥을 해서 병실에 밥을 날랐다. 지금의 내 또래였을 젊은 엄마가 빙판을 조심스럽게 걸어서 보온도시락에 담아온 밥을 펼쳐놓는 순간. 엄마의 제육볶음과 멸치볶음과 감자조림을 왜 이제야 기억해냈을까. 그때 집에서 S 정형외과 오는데 얼마나 걸렸어? 물으니 엄마는 몰라, 로터리 돌아서 걸었으니까 한 이십 분? 하고 어림짐작해 대답할 뿐이다. 내 밥과 아빠의 밥.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을 엄마의 노동을 생각한다.
엄마가 자는 시간이면 책을 읽었다. 병원에서 여성의 돌봄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이주혜의 소설 <자두>를 읽었다. “같은 색 옷을 입은 ‘여사님’들이 탕비실에서 음식을 나눠 먹거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각자 환자를 휠체어에 태운 채 나지막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자두>, 40쪽)을 지나칠 때면 엄마는 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들의 일이 얼마나 고될지에 관심을 보였다. 엄마에겐 모든 일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엄마에겐 언제나 모든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백화점에 가서도 화장실이 깨끗하려면 청소 아줌마가 얼마나 고될지를 말했고, 수영장에 가서도 청소 아줌마가 힘들겠다고 말했다. 호텔에서도 이렇게 넓은 곳이면 2명은 부족하다고 말한다. 엄마에겐 다른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게도.
수액 주머니를 밀며 병실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걷는 엄마. 엄마의 뒷모습에서 기억 속, 돌아가신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다.
엄마의 몸. 엄마는 어깨가 둥글고 등이 납작하고 팔뚝이 말랑말랑하다. 별다른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게 아닌데도 엄마의 등엔 약간의 등근육이 있다. 엄마의 몸에 노동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이다. 2020년엔 함께 속초로 여름휴가를 갔다. 에잇세컨츠에서 산 붉은색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엄마는 외옹치 해변을 향해 난 산책로를 걷는다. 나는 엄마의 등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며 상처 입은, 부서지지 않은 엄마의 몸을 본다. 엄마의 팔목에 남은 상흔, 그리고 그 팔로 쥐어보는 철조망.
속초 리조트 야외 풀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한때 동네 저수지 물개였다는 아빠는 듣도 보도 못한 영법으로 수영을 한다.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물에 발만 담근 채 비식 웃고 있다. 아빠와 나는 수영을 해 엄마에게 가 매달린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수평선은 저 멀리 있다. 아빠와 양손을 잡고 물속에서 점프를 하는 엄마. 아직은 엄마가 허리를 다치기 전.
"가, 가. 더 가서 놀아."
혹시나 아빠와 나의 놀이를 방해할까 혼자 있겠다고 말하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이곳에서 더 재밌는 시간을 보내길 바라고 있다. 엄마들. 제천 온천에서 “내가 접영 보여줄게 잘 봐봐.” 하고 인피니티풀에서 접영 시범을 보이는 나.
“나비 같지?”
“돼지 나비 같다.”
나를 놀리며 신나서 깔깔대는 엄마. 엄마에게 물 잡는 기쁨을 알리고 싶다. 선글라스를 낀 채 평영으로만 물 위를 질주하는 여유로움. 하늘을 향해 누우면 태양이 얼굴 위로 쏟아진다. 민소매 원피스의 끈 자국대로 타버린 엄마의 어깨를 보며 나는 코로나 19 이후의 여름은 엄마와 함께, 하와이에서 맞길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