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6)
이렇게 경이로운 작품이지만, 모두 흔히 말하는 '평민'들이 일상적인 노동의 과정에서 만든 거죠. 그 작품에 찬사를 보낼 때 우리는 곧 그런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는 셈입니다.
윌리엄 모리스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소설가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 속 한 장면,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런 ‘의미’랄까, ‘본질’이랄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반도 미싱에 적을 두고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노동하며 효율과 합리를 잘 따지지 않는다. 소설가 김금희 씨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어 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쭈어 본 일이 있다. "일하는 사람들을 작가가 그릴 때, 그들을 일종의 타성에 젖은 사람으로 그리는 걸 볼 때 약간 화가 나요."라고 작가는 말했다. 성실한 사람의 성실한 삶의 태도를 미련하거나 요령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소설을 만나 반가웠다.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요령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 엄마는 신길, 노량진, 방배동 등에서 살았다. 결혼 후 인천에서 시작된 엄마의 결혼생활은 금세 안양으로 적을 옮긴다. 불운하게도 엄마의 결혼생활은 결혼 직후부터 삐걱거렸다. 엄마는 임신 후 총 세 번 산부인과에 갔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임신 확인할 때, 애기집 보려고, 낳을 때, 그렇게 세 번 갔지. 그때도 다른 임산부는 한 달에 한 번씩 갔는데."
"왜 그랬어?"
"돈 없어서 그랬지 뭐."
내가 태어나자마자 할머니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열 개씩 제대로 달려있는지부터 확인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큰 문제없이 태어났다. 퇴원하자마자 엄마는 쉴 새 없이 아침밥을 했다. 몸조리를 돕기 위해 집에 와 있던 할머니가 시켰다고 했다. 뼈마디가 쑤실 때마다 요즘도 엄마는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가 당시를 회상하며 서운해할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느 날은 진지하게 산후조리원에 관해 검색해본 일도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채로도, 60대 여성인 현재의 엄마가 젊은 날의 억울함을 잊기 위해 입소해 전문적인 돌봄을 받는 것도 가능한지가 궁금했다. 삼십 년을 훌쩍 넘긴 원한을 잊는데 300만 원 정도라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금액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며 '최초의 기억'에 대해 물으면 각자 재미있는 답을 내놓는다. 내 최초의 기억은 안양의 두 번째 셋집에서 시작된다. 안양 7동의 두 번째 집. 지하였고, 단칸방이었는데도 아주 넓어 달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집 가운데엔 기둥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그 기둥은 하수관 같은 것이었을 듯하다.) 집은 아주 습했고, 짧은 기간 동안 가구가 다 망가졌다. 그 집 이후 우리는 지하로는 한 번도 집을 얻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며 엄마와 그 집에 대해 다시 이야기했다.
"그런 집을 돈 받고 다른 사람한테 빌려줘선 안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또 열을 냈다. 엄마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교회에서 쌀을 빌려다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엄마는 기억했다. 아이를 낳은 후 전업주부로 살던 엄마는 그즈음부터 동네 어른들이 알려주는 대로 부업을 시작한다. 엄마는 동네 여자들과 모여 앉아 실밥 떼는 일을 했다. 엄마의 부업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만다. 친구와 (J라는 이름도 엄마는 정확히 기억했다) 놀던 내가 친구의 손에 할퀴어 얼굴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또 할머니와 아빠에게 혼났고, 그 일 역시 아주 억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양의 세 번째 셋집은 안양 6동에 있었다. 덕천마을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빠들은 대개 공장에 출근했고, 엄마들은 모여서 구슬을 꿰는 등 건당 10원짜리 부업을 하며 허리를 숙인 채 일을 했다. 엄마가 네모난 평상 같은 것에 둘러앉아 고개를 잔뜩 숙이고 일을 하는 동안 그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풍경 같은 것이 가끔 기억이 난다.
우리가 살던 덕천마을은 이제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쌀을 빌어 먹던 교회도, 턱이 높은 단칸방도 이제 그곳엔 없다. 현재 우리가 살던 안양 7동엔 '덕천마을 래미안'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지붕을 맞댄 다세대 주택 사이, 좁은 틈으로 쏟아지던 햇볕. 골목을 뛰어놀던 내복 차림의 아이들. 엄마와 철거 전 덕천마을 풍경을 찍은 사진을 함께 보았다. (링크 : https://heriankim.tistory.com/entry/%EB%8D%95%EC%B2%9C%EB%A7%88%EC%9D%84 ) 엄마는 서로 맞대고 선 좁은 골목들을 보며 이쯤에 우리가 살았던 것 같다고 기억해냈다. 덕천마을 철거는 2014년쯤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가 똑똑한 애라는 걸 엄마와 아빠가 알게 된 것도 대략 안양에서 살던 즈음의 일이다. 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엄마와 아빠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똑똑한 거 언제 알았어?" 아빠는 서너 살 무렵의 일로 기억했다. 구둣방을 하던 외삼촌의 가게를 찾아가다 저 글자를 읽어봐라 하니 '콘택트렌즈'라는 받침이 많고 어려운 글자를 똑똑히 읽길래 좀 다른가보다 했다고. 엄마는 부업을 하던 시기의 일로 기억했다. 숫자는 가르쳐줬지만 한글은 딱히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부업을 하느라 옆에 두면 같이 놀던 친구의 동화책을 옆에서 힐끔대며 보며 글자를 읽고 있더라고. (글자와 나의 유구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엄마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엄마라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살림은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가에선 그렇게 지내느니 우선 친정으로 오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다섯 살 정도 된 나를 아빠와 둘이 두고 친정에 간 엄마는 도저히 내가 눈에 밟혀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단다. 돌아온 엄마는 문지방에 쭈그리고 누워있는 내복 차림의 나를 보고 안쓰럽다고 생각하고 만다. 아빠는 방 가운데에 이불을 덮고 제대로 누워 자고 있었고, 나는 구석에서 쭈그린 채 이불도 덮지 못하고 자고 있더라고.
"나도 아버지 없이 자랐는데, 그때 우리 딸 아빠 없는 애로 안 키워야지 생각했지."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돌아왔을지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나의 기분은 정영수의 소설 <두 사람의 세계>의 한 부분을 인용해 적어두고 싶다. 애인의 폭력적인 성향을 견디지 못해 헤어지기로 결심한 여공 영선. 그는 전형적인 이야기대로 헤어지기로 한 후에야 임신을 알게 된다.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병원까지 간 그는 하필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 순간 '자신의 뱃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의 삶'을 상상하고 만다. 훗날 태어나게 될 영선의 아이, 소설 속 서술자는 수술 없이 그 병원을 나서는 영선에게 말한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일단 진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그리고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 순간의 두려움과 죄책감만 이겨내면 이후 당신이 오래도록 겪게 될 일을 겪지 않아도 될 거라고."
우리는 아빠가 일할 새 공장을 찾아 안산으로 이사를 결정한다. 부모님의 무릎에 앉아 1톤 트럭을 타고 도착한 원곡동의 새 집. 역시 단칸방이었고, 아직 연탄보일러를 썼고, 부엌 시멘트가 갈라져 가끔 그 틈으로 지렁이가 기어 다니곤 했다. 엄마는 그 집에서 캔디와 핑키라는 이름의 강아지 두 마리와 나를 길렀다. 원곡동의 집은 디귿자 모양으로 된 일층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집'이라는 단어보다 '방'이라는 단어가 그 집엔 더 적절할 듯하다. 심지어 각 방엔 화장실마저 딸려있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사는 남자가 그 건물엔 단 둘 뿐이었다. 그중 한 여자가 우리 엄마였다. 공용 화장실 청소는 그 두 여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엄마는 꾀를 부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일을 떠맡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 아빠는 술을 조금도 마시지 못하는데, 화장실은 늘 토사물로 엉망이었다. 화장실 가장 가까운 방에 사는 H아저씨가 자주 그런 짓을 했다. 나는 그 아저씨를 정말 미워했다.
"H 아저씨도 삼청교육대 갔다 왔었다고 했었어."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부모님과 함께 보다 엄마가 문득 말했다. H 아저씨는 가족 없이 문간방에 혼자 살며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토를 해서 화장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엄마는 도통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러지 말라고 항의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주 화장실을 청소했다. 엄마는 성실한 것만큼은 아주 잘하는 사람이니까.
대체 왜 나는 참지 못하나, 왜 나는 이렇게 화를 내는가에 대해 예전부터 오래 생각해왔다. 아마 내 화가 시작된 곳은 그 공용 화장실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제대로 화를 내지 않으니 나라도 꼭 화를 내야 할 일엔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 엄마 대신 화를 내고 싶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원곡동에서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욕을 배웠고, 부모님께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고무줄을 넘고 다녔고, 슈퍼맨 놀이를 한다고 2층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엄마의 급여를 받는 노동은 이 무렵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엔 같은 건물에 살던 할머니가 배밭 과수원 일을 소개해주었다.
"팔각정 근처에서 과수원 꽃 솎아주는 일이었는데 금방 나오지 말랬지."
"아 거기서?"
"응. 잘린 거지."
엄마는 손이 빠르지 않다. 몰아붙일수록 실수가 잦아지는 사람이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엄마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엄마를,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는 엄마를 상상한다. 엄마는 단순하고 쉬운 일을 일을 짧게 반복했다.
"반월공단에 누가 소개해줘서 갔지. 용접 똥 떼는 일이었는데, 한 육 개월 했나. 잘 안 보여. 속에 있어서."
엄마는 그 일도 금세 그만두게 되었다.
"H네 엄마 따라서 차 부품 만드는 공장 일용직도 다녔지. 경비 아저씨들이 그냥 다니지 왜 그만두냐고 하는데 정규직 하라고 붙잡는 거 나왔지."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의 일 년가량을 엄마는 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엄마의 다음 일자리는 도금단지였다.
"한 달은 했나. 같이 일하던 할매가 내가 반장하고 놀아난다고 오해싸서 때려쳤지." ('오해싸서'라는 서술어는 엄마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다.)
엄마는 도금단지에서 일을 하며 나름대로 노력했다. 포장 일을 하기로 정해서 입사했지만 시키지 않은 화장실 청소를 대신했고, 늘 일찍 출근했다. 도금단지는 엄청 시끄러웠다고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퇴사 이유에 대해 여러 번 물을수록 엄마의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변했다.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사장 조카'인 직원이 가슴을 만지려고 했다는 것.
"거기는 그 할매 말고는 다 가족이야. 내 말을 안 믿을 거 같아서 말하기도 싫고 그냥 때려쳤지."
당시 엄마는 30대 중반이었다.
엄마는 오해 싸서, 부애나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첫 번째는 '오해를 사서', 두 번째는 '부화가 나서'라는 뜻이 아닐까 짐작한다. (부애나다는 검색 결과 울산 방언이라고 하는데, 어느 시점에 엄마의 말에 묻은 단어인지가 궁금하다.) 엄마는 자기 입장에 대해 변명하는 걸 어려워한다. 내가 아는 엄마는 속이 상하면 변명을 하는 대신 자리를 피하고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뒤돌아 서서 부애나서 잠을 못 이루는 사람.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았을 사람이다. 그런 엄마가 오해를 살 때마다 얼마나 속상해하고 부애가 났을지 나는 이제야 짐작할 뿐이다.
저숙련 저학력 기혼 노동자인 엄마에게, 엄마들에게 저런 희롱에 가까운 오해 및 모함은 도무지 피할 수가 없는 일일까. 나는 엄마의 노동사를 옮겨적으며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저런 순간들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복잡해졌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항의하는 대신 일을 그만두는 걸 택했을 것이다. 당시의 엄마에게 왜 제대로 화내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냐고, 나는 말할 수가 없다. 그 어떤 말도 더할 수가 없다.
엄마와 아빠가 모두 은퇴하면서 부모님은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래 살던 안산에서 부모님은 곧 떠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엄마와 아빠는 삼십 년 전쯤 우리가 살던 원곡동 그 집에 가보았다고 했다. 엄마가 과수원에서 배를 따고, 용접 똥을 떼고, 포장을 하고, 빵공장, 전기공장을 다니던 곳. 교통사고가 난 나를 돌보고 강아지 두 마리를 돌보던 곳. 당연히 헐고 새로 지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여전히 그 집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예전의 모습보다는 꽤 수리가 된 모습이긴 했다고 했다.
"화장실은 그대로 있어?"
"없드라. 공사 새로 했는지."
엄마와 아빠는 그 집을 보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울적하기도 하고, 이미 떠나온 한 시절을 보며 기이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고 한다. 그 집은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산 단칸방이었다. 지금 그 집엔 외국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원곡동을 잊고 있었다.
원곡동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김중미 작가의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의 리뷰를 쓰며 아래와 같이 덧붙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곳에 여전히 가난이 존재한다. '체공녀 강주룡'의 시대와,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고 해냈던 은강방직 '여공'들의 투쟁의 시대와, 7미터 타워크레인에 매달린 여성 노동자의 시대. 강경애의 소설과 김중미의 소설 사이의 시차. "임용고시를 단박에 붙었다는 영웅적 서사"(25쪽)가 쉬이 허락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관해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내가 살던 '안산시 원곡동'을 잘 기억하려 하지 않던 나는, '성적이 좋은 상위권 아이들은 면학실로 가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73쪽)하던 내 학창시절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이 시대 소녀들의 삶이 이전과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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