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효선 May 25. 2021

청소부인 엄마가 닦던 계단을 과외선생인 내가 올랐다

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8)

청소부를 위한 조언 : 당신이 일을 철저히 한다는 걸 그들이 알게 할 것. 일을 시작하는 첫날, 청소한 뒤 가구를 제자리에 놓을 때 잘못 놓을 것......
루시아 벌린 <청소부 매뉴얼>






조해진의 소설 <문래>를 읽으며 나는 그의 '문래'에서 나의 원곡동을 발견했다. '한 공장에서 6개월 이상을 일하지 못한' 엄마의 이야기를 보며 자주 일자리에서 밀려난 나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단체 생활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엄마의 MBTI는 ISTP. 나는 MBTI는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쇠를 깎는 소리, 떨이를 외치는 상인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미친 여자의 목소리와 무당의 신들린 웃음소리, 개와 염소의 비명, 그런 소리들 속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흙으로 집을 짓거나 금 밖의 술래로부터 도망 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고 기억하는 소설가의 문래. "돌아서서 발꿈치만 살짝 들어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어머니"의 노동은 나의 원곡동과 먼 곳에 있지 않다. 소설이 문래를 말하지 않았듯, 나도 원곡동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즘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끄럽지만", 하고 말을 꺼내고 "제가 부끄러울 일은 아니죠." 하고 다시 덧붙이곤 한다. 이 '부끄럽지만'을 서두에 꺼내지 않는 건 앞으로도 내 과제가 될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말의 일이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하교하던 나는 주차한 자동차와 주행 중인 자동차 사이에 끼어 몸이 뱅글 돌았다. 빙판길에 우유팩이 떨어지며 터지던 모습이 떠오른다. 허벅지 골절, 골반 골절, 장 파열로 전치 6주 진단을 받았다. 손가락 접합을 가장 잘하는 병원도 안산에 있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안산엔 정형외과가 많다. 그만큼 사고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교통사고 환자와 공장 노동자가 뒤섞인 남성용 병실이었다. 20대 초반이던 산재환자 K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엄마, 아빠는 밤이면 집으로 돌아가 잤다. 그가 부모님이 없는 병실에서 내 신체를 만졌고, 그게 매우 부적절한 방식이었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알았다. (이 일 역시 내가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고 이제야 나는 생각하지만, 엄마 아빠 외의 사람에게는 말해본 기억이 없다.)


골절이 붙는 과정에서 생긴 종양을 제거하느라 3학년 여름방학에 다시 입원을 해야 했다. 엄마의 노동은 내 병간호로 인해 잠시 멈추게 된다. 젊은 엄마는 병원으로 밥을 해다 나르고, 법원을 따라다니며 그렇게 두 계절을 보낸다. 엄마가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된 건 내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4학년의 일이다.




엄마는 P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엔 라디오 등에서 광고를 많이 하던 빵공장이었다. 빵공장 광고 씨엠송만 들어도 입에 침이 돌았다. 엄마가 퇴근할 때마다 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초콜릿이 묻은 크루아상. 나는 매일매일 엄마가 오길 기다렸다. 엄마의 기억에 그 빵공장에서의 노동도 별로 길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6개월 만에 빵공장도 그만두고 만다. "사람들이 말이 많아." 엄마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엄마는 집단과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잡코리아도 알바몬도 없던 시대, 부모님은 '생활정보지'를 통해 구직을 했다. 엄마만큼이나 자주 실직하던 아빠는 항상 '교차로'같은 생활정보지를 가져다 보았다. 아빠가 발견한 두세 줄짜리 구인. 마치 전보를 치는 듯한 암호. 나이와 성별과 경력 유무를 명시한 그 공고를 보고 엄마는 이후 D전기에 입사하게 된다. 집에서 통근버스까지 다니는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엄마는 자동차 스위치를 조립하는 일을 했다. 이번 일은 제법 오래 할 수 있었다. D전기에 다니며 엄마는 수술을 하고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회복하기 전 출근했다. 그나마 모든 게 조금쯤은 나아지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말, 우리는 원곡동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의 사택이었다. 내 방이 생겼고, 컴퓨터가 생겼다. 그리고 그 해, IMF가 터졌다.


엄마는 한 집단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 엄마는 IMF와 함께 실직했다. 그만둔 거야, 잘린 거야. 내 물음에 엄마는 "짤렸지." 하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그때의 퇴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A라인 물건을 대주는 사람인데 갑자기 B라인 물건도 대주라는 거야. 농땡이 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안 하니까 내가 대신하라고. 나는 내 자존심이 있으니까 '내 자리 아닌데 가라는 대로 가는 게 싫다'라고 말했지. 내 파트너 일을 시킨 게 아니니까. 주임이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하더라고. 물품 대주는 일은 책임자인 자기 일인데.


나는 엄마가 정당한 항의를 했다고 생각하고, 엄마가 이 일에 대해 말하면서 언급한 '자존심'이라는 단어가 무척 좋았고, 엄마가 이런 이유로 일을 '잘렸다'면 엄마를 노동법이 보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공장 노동자 생활도 이 시점에 막을 내린다. 엄마는 이제 청소 노동자가 된다.


공공근로부터 시작했다. 주로 둑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나대지를 온종일 헤매다 온 엄마의 양말에서 어떤 냄새가 났는지 기억한다. 엄마의 운동화가 어떤 방식으로 닳아있었는지, 엄마의 발이 어떻게 부어있었는지. 엄마는 공공근로를 하다 손가락을 다쳤다. 봉고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다 실수로 다른 사람이 문을 잘못 닫아 찧어서 다쳤다고 했다. 엄마의 세 번째 손가락은 지금도 잘 굽혀지지 않는다.


엄마의 다음 일은 유통상가 청소 일이었다. 플래카드를 본 아빠가 엄마에게 사무실에 가보라고 추천했다. 엄마는 시화에 있는 사무실을 겨우겨우 찾아갔다. 근무 시간은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 급여는 43만 원이었다. (엄마는 이런 숫자를 무척 정확하게 기억한다.) 공단에 있는 화장실과 계단 청소를 했고, 공장 청소를 했다. 이 일은 6개월가량 할 수 있었다.




다음 일은 아파트 관리실 소속 청소부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일자리로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주'를 닦는 일은 청소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로 꼽힌다. 계단 끄트머리를 감싸고 있는 금속을 신주라고 하는데, 요철이 진 상태로 오목한 곳에 더러움이 묻어있어 닦아내는 일의 난이도가 높다. 이 '신주'를 닦아야 하는 청소는 대개 기피 업무로 꼽힌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이 하느니 젊은 사람이 하는 게 낫지."


업무분장은 그런 식으로 정해졌다. 당시 30대 후반, 40대 초반을 오가던 엄마는 신주를 닦는 담당이 되었다.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엄마는 부지런히 신주를 닦았다. 엄마는 그 일 역시 일 년 정도 했다.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다.


엄마의 다음 일은 병원 청소, 이번에도 적응을 잘하지 못해 두어 달만 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 일은 다시 아파트 관리실 소속 청소. 엄마 표현으론 '돈이 쩍어'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엄마가 일하던 아파트 단지엔 내 중학교 친구들이 살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서도 나는 엄마의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엄마의 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 자세히 알게 된 후, 어른이 된 후엔 그 단지들로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러 다녔다. 관리실에 정해진 비용을 납부하고 아파트 게시판에 과외 전단을 붙이기도 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관리실을 볼 때면 이 관리실의 소속이었던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다음 일은 B 사우나 청소였다. 한 달에 팔십만 원, 야간 근무를 하면 구십 만원을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이 즈음 내게도 나름 큰일이 벌어졌었는데,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다 집 근처에서 중년 남자에게 붙잡혀 폭행당할 뻔한 일이 그것이다. 이상하게 어두운 밤이었다. 뒤에서 강아지가 사납게 짖어 뛰어서 집에 가려고 했었다. 별안간 나를 잡던 손. 취한 목소리와 강한 악력, 협박하는 음성. (이런 일은 현실로 벌어지더라도 꼭 꿈에서 겪는 일처럼 현실로 알아채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목이 졸린 자리엔 내가 늘 입고 다니던 터틀넥의 무늬가 시뻘겋게 남았다. 딱지가 꽤 오래 낫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 길로는 다니지도 못했다.


"엄마, 제발 밤에 집에 있으면 안 돼?"


야간 근무를 해야 구십 만원을 받을 수 있는 엄마에겐 무척 철이 없는 말이었을 것임을 이제 안다. 엄마가 내 말을 듣고 일을 바로 그만두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된 나는 야간 교대근무는 여성의 유방암 발병 확률을 높이며, 22년간 야간 교대근무를 하다 걸린 유방암은 산재라는 판례를 안다. 자주 일을 그만두곤 하던 엄마가 운이 좋아 그 일자리에서 비켜났다는 것도.


아빠는 내가 등하굣길에 오가던 그 길을 몇 주 동안 계속 같은 시간에 돌아다녔다. 범인의 인상착의를 내게 물었고, 수상한 사람이 지나다니는지 계속 길을 들여다봤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자신의 딸을 강간한 범죄자를 쫓는 건조하게 타오르는 눈망울을 보며 나는 그 길을 몇 번이고 오가던 아빠를 떠올렸다.




어려운 형편에 도드라지게 공부를 잘하는 내가 엄마에게 크게 미안했던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 1학년 1학기에 나는 우연히 1등을 했다. 아직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잘 모르던 어린이 시절이다. 서울 M동이 집이었던 J선생님은 1등을 했으니 학교에 엄마가 오셔야 한다고 했다. 김치를 기가 막히게 잘 담는 엄마는 깍두기 김치를 담아 학교에 왔다. (나중에야 엄마는 봉투도 함께 준비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몇 년 후에도 청소로 한 달에 43만 원을 벌던 사람인데.)


"효선이 이번에도 1등 했네. 이번엔 엄마가 뭐 해다 주신대?"

"물김치 해오신대요."


엄마와 미리 약속한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 선생님이 물김치 해오래. 하고 말을 전했다. 엄마는 봉투를 한번 더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가 과수원에 나가 배꽃을 따고 외할머니에게 돈을 빌리던 시절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엔 자율적인 어머니 모임 같은 것이 생겨났다. 반에서 1등에서 5등까지, 성적이 좋은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이 각 16만 원씩 각출해 아이들 간식을 사주자는 전화를 엄마는 받았다. 엄마가 주간 근무를 하면 팔십 만원, 야간 근무를 하면 구십 만원을 받던 시절의 일이다. 나는 엄마에게 그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반 모든 아이들이 간식을 나누어 먹는 시간, 나는 고집스럽게 간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착한 친구가 내게도 간식을 건넸지만 나는.




엄마는 사우나 청소일을 8개월쯤 했고, 이후엔 Y아파트 가정부 일을 하게 된다.


"내가 칫솔을 훔쳤다고 하잖아. 칫솔을 훔쳤겠냐? 귀걸이가 그렇게 많은데도 손도 안 댔는데."


엄마의 급여는 세 달 동안 백만 원이었다. 세 달의 근무 이후 백이십만 원으로 급여를 올려주는 대신 고용주가 내건 조건은 다시는 그들의 물건에 손을 대지 말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1.4 후퇴를 경험하기 전부터 이미 예수를 믿었다. 모태신앙인 엄마가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귀걸이며 목걸이 같은 예쁘고 반짝이는 걸 너무 좋아하는 엄마가, 결혼을 하며 생긴 귀금속도 모두 잃어버리거나 팔아야 했던 엄마가, 귀걸이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아는 엄마가, 그러면서도 절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선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렸을 엄마가, 고작 칫솔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다. 엄마는 참지 못하고 그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예술의 전당 청소일을 하려다 실패한 것을 두고 엄마는 무척 아쉬워했다. 지금은 노조도 만들어져 무척 좋은 일자리라며. (뒤집어 말하면 엄마는 노조의 보호 같은 건 받을 수 없는 취약한 일자리에서만 일했다는 뜻이 된다.) 이후 엄마는 메가박스 청소일을 두 달 정도 했다. 그리고 용역을 통해 내가 졸업한 A고에, 드디어 입성하게 된다. 엄마의 청소 노동은 이제 근로기준법 안의 세계로 진입한다.


"처음부터 A고라고 하면 안 갔지. 용역에서 가라고 하는데 가보니까 거기였지."


왜 하필 A 고였는지 궁금해하던 내 의문은 이 글을 쓰며 엄마와 이야기를 한 끝에 드디어 해소되었다. 엄마도 알고 A고에 간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에 간 딸이 불과 2년 전에 졸업한 학교. 그렇지만 알고 A고에 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인격 모독, 성희롱, 가혹한 노동, 성에 차지 않는 급여. 학교 청소일은 그 모든 청소일의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을 가진 일자리였다. 비교적 인간적이었고, 급여가 상식적이었으며, 출퇴근 시간이 정확하게 지켜졌다. 나를 아는 선생님들이 엄마를 존중했고, 엄마는 선생님들께 학창 시절에 내가 얼마나 성실한 학생이었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엄마는 비로소 손이 느려 자주 일을 그만두던 사람이 아닌, 한 아이의 어머니로 존중받을 수 있었다.


엄마가 A고에 다니던 처음 일이 년 동안, 나는 엄마가 일하는 직장이 A고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다. 수능을 앞둔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좋은 학교'에 간 선배들이 학교 방문을 해야 한다는 말에 졸업 후 학교를 갔던 적이 있다. 엄마는 그때 A고에 있었을까. 나는 엄마가 쓰레기통을 비웠던 지하철역 앞 메가박스에서 '알포인트'를 봤고, 엄마가 닦던 그 계단, '신주'를 밟으며 과외를 하러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엄마의 노동은 결코 나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이전 07화 엄마가 말했다. “요즘은 수영하는 게 제일 즐거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