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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선 Jun 13. 2021

엄마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때

봄의 열매, 여름의 사랑 (10)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박완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엄마와 마트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서울역 앞 '중리단길'에서 몸집이 아주 큰 남자와 몸집이 작은 여자가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자는 여자가 던져버린 휴대폰을 가져오라고 자꾸만 소리를 질렀다. 큰 남자가 작은 여자를 위협하고 있는 모습. 근처 가게 주인아주머니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싸움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안전할 정도로 멀리 비켜서서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엄마는 샤샤삭 도망갔다. (엄마는 이럴 땐 놀랍도록 재빠르다) 나는 그런 일을 보면 어쩐지 참을 수 없어진다. 20리터 쓰레기봉투에 파프리카며 감자를 담은 채, 쓰레기봉투를 팔뚝에 걸고,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혹시 있나요?"


여자는 웃으며 내 팔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나는 그 여자의 표정에서 이 일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심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으리라 감지했다. 두 사람에게 벌어진 흔한 감정싸움이고, 심각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때때로 나는 도저히 이런 일에선 비켜설 수가 없었다. 엄마는 샤샤삭 도망간 채 20미터쯤 떨어져서 멈추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저..."


어쩌면 내가 그 여자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나 역시 알았다. 여자는 남자 친구로 보이는 그 남자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 욕을 했고, 내 팔목을 잡은 채 남자의 약을 올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언뜻 화해하는 것처럼 다시 가까이 섰다. 나는 작은 여자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서 30미터쯤 위로 가면 파출소가 있어요. 신고하시려면 거기서 하세요."


여자와 거의 화해를 한 남자가 내 쪽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남자는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고 그쪽 인생이나 잘 사시라고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인생이나 잘 살라고? 내가 내 인생 잘 못 산 게 뭔데? 날 알아? 엄마는 일이 다 마무리되고 그 사람들이 차를 타고 사라지고 나서야 내 옆에 섰다. "아이 심장 뛰어..." 엄마도 소곤거렸다. 적어도 엄마는 내게 이런 때 끼어들지 말라고 비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잘했어.. 엄마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지랖이 넓어 이득을 본 순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큰 남자는 내게도 위협적이다. 그렇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위협을 당하는 순간을 나는 어쩐지 가만히 넘길 수가 없다. 엄마와 함께 간 경포대에서도 술에 취해 제대로 서지 못하는 어린 여자 (나는 그가 미성년자라고 생각했다)를 파출소에 데려다주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호텔로 갈 수가 있었다. 나는 길에서 우는 여자를 보면 말을 걸고, 길을 못 찾는 여자가 도움을 청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여자가 위험한 건 가만히 넘길 수가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맞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마도 아빠에게 맞았던 적이 있다. 실은 꽤 오래, 자주 맞았다. 아빠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엄마와 결혼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엄마와 결혼한 직후, 임신한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 퇴근을 하고 엄마가 자신을 맞아주던 순간이었다고 말하던 아빠가. 어떻게 그런 엄마를 때릴 수가 있지. 나는 아직도 그 시기를 이해할 수 없고, 그 상황에 대해 오래, 아주 오래, 오래오래오래, 생각해야 했다.


나는 '맞는 여자'를 이야기 속에서 너무 많이 봤다. 김첨지의 아내가 맞았고, 김동리의 여자도, 김승옥의 여자도 맞았다. (어릴 적 나는 도서관에서 살았고, 내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점수는 116/120점이다. 문학 동아리를 했고, 문학 학회를 했고, 국어 교육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소설을 팔아 돈을 번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그 '맞는 여자'라는 게, 이 세상에 그렇게 흔한 일이 우리 엄마한테도 벌어진다는 게 왜 이렇게 참을 수 없는 건지. 아빠는 어떻게 엄마를 때릴 수 있지. 엄마는 어떻게 그런 아빠를 지금도 저렇게 사랑하는 눈으로 보지. 왜 나 역시 아빠의 어떤 부분을 어느새 연민하고 있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 버려."


조세희의 이 소설 속 문장을 나는 바꾸어 읽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이유는 엄마가 ㅇㅇ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너처럼 미련한 여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라고 말했고, 엄마는 미련하니까 너랑 살지, 하고 대들었다. 엄마를 ㅇㅇ라고 부르는 악당은 다. 나는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하고 싶었다. 아빠가 다시는 엄마를 때릴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내 머리가 굵어지고, 부엌칼을 아빠 앞에 내밀며 이어진 신파극. 나는 울고 소리쳤고, 아빠는 그다음엔 내가 보는 앞에선 엄마를 때리지 않았다.




착하고 얌전한 사람은 화도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보통 착각을 한다.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을 흔히 '바보 같다'라고 생각하는듯했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호오가 분명하고 싫음에 대한 감각이 디테일하고, 한번 싫어진 것이라면 절대 좋아하지 않는, 단단하게 막힌 데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어린 내가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내가 공부 잘해서 저 사람들 코 납작하게 해 줄게."


3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잠을 자기 위해 오래 상담을 받았다. 내 상담 선생님과 대화를 하며 최근 깨닫게 된 사실은 그게 실은 내 언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린 나는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어서 내 유년의 그늘에 대항해 복수하는 방법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어른의 말을 대신하는 어린이였다. 도대체 공부를 잘하는 게 뭐라고, 공부를 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게 뭐라고.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딸이 우연히 얻어낸 어떤 성취가(내가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게) 이후의 엄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청소부인 엄마의 노동은 내 대학 입학을 계기로 그 결이 조금 달라지게 된다. 대학 입학 이후 내게는 더 이상 돈이 들지 않아 엄마의 부담도 그만큼 줄었다. 마침 엄마가 얻은 학교 청소 일은 최소한의 노동법이 지켜지는 좋은 일자리였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이기도 했다. 엄마는 어디서든 '딸이 서울대 간' 청소부로 일했다. 엄마는 그 이후의 시절을 그 이전에 비해선 아주 좋게 기억한다.


내가 졸업한 A고에서 엄마는 화장실 청소를 하며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근무 시간이 짧았고, 용역을 통해 구한 일이라 용역 몫의 급여를 떼서 그만큼 월급도 적었다. 그 당시 엄마는 5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 나 말할 거 있어요."

"말씀하세요."

"나 돈이 너무 적어서 이 일을 더 못하겠어요."


선생님께선 깊이 고민을 하다 엄마에게 답을 줬다고 한다. 알았어요, 우선 그만두시면 내가 또 부를 테니 조금 쉬세요. (엄마는 이 기간에 예술의 전당 청소일 공고가 나와 몹시 가고 싶어 했지만 원서를 쓰지 못하게 된다.) 약속은 지켜졌다. 엄마는 다시 A고에 고용되었다. 이번엔 학교가 엄마를 직접 고용했고, 일하는 시간이 늘어 월급도 칠십만 원으로 올랐다. 엄마는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내 고3 담임 선생님이던 I 선생님을 통해 다른 선생님들도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너희들 저분이 누구신지 알아." 하고 웃으며 지나갔다. 엄마는 나를 가르쳤던 생물 선생님을 좋게 기억했다. "나도 학교 선생님 아니면 뜨내기 아저씨다. 대학 나와서 애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던 사람. 엄마한테 힘드냐고 초콜릿을 주기도 했던. 선생님의 고향이 서산이었고, 엄마의 고향이 당진이라 가끔 말을 섞으며 지냈다고 한다.


"거기는 화장실만 청소하고 만고땡이었어."


엄마는 A고에서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땐 좀처럼 싫었다거나, 힘들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 학교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았다. 청소부의 딸, 서울대 입학생.




엄마는 수술을 하느라 A고를 그만두게 됐다. 일자리를 잠시 잃은 엄마는 공고를 보고 다시 B고에 입사하게 된다. 2007년 3월 19일이 엄마의 입사일, 엄마는 첫 월급으로 98만 원을 받았다. (이 역시 엄마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엄마의 숫자들 중 하나다.) B고에서 엄마는 5068일, 13년 8개월 동안 청소를 했다. 그 긴 시간을 결코 한 편의 글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처음 이 글을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그 학교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기록해두고 싶다.


엄마가 채용된 자리는 경쟁률이 높았다. 엄마 스스로 생각하기엔 엄마 자신이 별로 특별히 장점이 있어 채용이 된 것 같진 않았다. 엄마가 기억하는 채용의 이유는 이랬다. "둘이 싸우지 않을 거 같아서. 내가 나이차 나니까." 이미 몇 명이 일이 힘들다, 사람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만둔 자리였다. 아마 엄마는 조용히 다니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겠지, 생각한다.


엄마는 동료로 Y와 함께 일했다. 둘이 공간을 나눠 청소를 했다. 그와 엄마는 거의 10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다. 그는 금세 엄마가 어떤 타입인지 간파했다. 세상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약하고 순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그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Y가 자기는 허리 디스크라고 무거운 거 내가 들으래."

"아파도 엄마가 더 아프지. 무슨 소리래 그게?"


10살이나 많은 엄마가 Y 대신 매번 쓰레기봉투를 든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당황했다. 엄마가 청소부 일을 하는 내내 나는 대학을 다녔고, 과외를 했고, 취업준비를 했고, 독립을 해 엄마 곁에서 떠나갔다. 엄마는 아주 가끔 내게 자기 일의 어떤 부분이 힘든지에 대해 얼핏 공유했다. 내겐 흥분한 채 기승전결 없이 '전' 혹은 '위기'에 해당하는 부분만 쏟아내는 엄마의 얘기가 맥락 없게 들렸고, 때론 "엄마, 그건 엄마가 잘못한 거네. 우선 게으름은 피우면 안 되지." 하고 엄마를 가르치기도 했다. 엄마는 점점 내게 자기 일에 대해 말을 하지 않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몸에 상처가 났다."

고.


Y는 엄마를 지속적으로 때렸다. 엄마의 하얗고 결이 부드러운 살이 잔뜩 꼬집혀 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에게 엄마를 꼬집을 이유는 엄마의 존재, 그 모든 것이었다. 엄마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 엄마가 다른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고 오면 무슨 얘기를 했냐고 잔뜩 캐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답답한 사람이라고 꼬집고 때렸다고 한다. 나는 일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멍든 몸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엄마에게 고소하자고 했다. 신고하자고 계속 설득했지만, 엄마는 계속 망설였다.


"그래도 Y도 사정이 있어..."

(그에게도 명예가 있을 것이기에 그의 개인 사정에 대해선 굳이 적어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인 엄마는 아마도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내미는 것, 그게 엄마가 섬기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대접을 받은 엄마가 계속 일을 하게 내버려 둔 나 자신을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는 입사 5년 차 정도였다. 가족을 책임질 만큼 충분하게 돈을 벌진 못했지만, 적어도 굶어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내가 어떤 설득을 했고, 엄마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기억은 오래 비어있었다. 어쨌든 엄마는 계속 그 일을 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그 결정을, 기나긴 장기근속을 안심했을 수도 있다) 결국 Y는 스스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지각이 잦았고, 무단결근이 잦았다. 나는 근태를 스스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엄마는 버티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 엄마가 청소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내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내 친구들 역시 '엄마를 매번 꼬집은 직장 동료' 얘기를 듣고 어이없어했다. 유치해. 미친 거 아니야? 또라이 아니야?


나는 제대로 화내지 못한 나 자신을, 엄마를 숨긴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친구 M이 내게 말해주었다. "아니야. 너는 항상 부모님에게 무척 고마워했어. 네 상황에 대해 무척 감사해했고 엄마를 정말 사랑했어." 엄마 역시 이 얘기에 대해 다시 얘기하며 당시 내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기억해내 내게 말해주었다. "네가 먹여 살리겠다고 일 그만두고 오라고 했지. 내가 정년퇴직하고 간다고 한 거야."


나는 '팔뚝을 꼬집힌 엄마'를 두고도 내가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 덕분에, 그 상황을 기억해낸 엄마 덕분에 구원받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청소일을 하는 중년 여성이라면 일반적으로 그의 호칭은 여사님, 혹은 이모님 정도가 될 것이다. B고에서 학교 청소를 하는 엄마에게도 그러한 호칭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기분에 따라 엄마의 귀한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K가 그랬다.


"춘실아! 춘실아!!!!! 춘실아!!!!"


엄마의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사랑으로 지어준 이름. 청소일을 한다고 엄마의 이름까지 우스워질 이유가 없다. 엄마가 한 계단청소에 시비를 거느라 K는 계단에 서서 30분 동안 엄마의 이름을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며 불렀다. 그 히스테릭한 풍경을 나는 가끔 상상하곤 했다.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도는 줄 알았어."


엄마는 다 지나간 일처럼 얘기하지만.



"여자 기숙사 일층에서 물이 늦게 빠져서 물이 조금 고였어. 물 빨아들이는 하수구를 내가 비뚤게 놓은 것 같다고, H가 욕을 막 하는 거야. 어떤 년이 그랬냐고. 시팔년, 조팔년, 청소나 똑바로 하지. 뻔히 내가 듣는 거 알면서..."


엄마는 30분 간 H의 욕을 듣고 있었다. 엄마는 H가 자신을 괴롭힌 상황에 대해 여러 번 말했다. 사람을 욕하고, 뒤에서 미행하고, 일을 얼마나 했나 보자고 그러고. 실장도 아니고 자기가 과장인데 무슨 권한으로 나한테 그러나. 욕지거리를 왜 하는 거야. 시팔년, 조팔년, 청소나 똑바로 하지. 


"선생님, 나 너무 속상해 죽겠어요. 하니까 그러더라고. 왜 신고 안 했느냐. 그거 말하면 경찰이 그 사람 잡아갈 텐데."


결국 엄마는 정년퇴직을 하며 엄마를 괴롭힌 H보다 먼저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H가 괴롭힌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엄마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여자를 우습게 보는 거야."


엄마가 그렇게,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때 나는 그들을 고발하는 상상을 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처럼.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 내게도 치밀었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의 그 소설엔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왜. 어떻게 사랑하고 연민할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엄마는 2021년 겨울 은퇴했다. 나와 엄마는 계절을 건너며 수영을 함께 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며 나는 엄마에게서 자꾸만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엄마와 나는 우리를 '덜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덜렁대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자꾸 부딪치고, 다치고서도 왜 다쳤는지를 원인을 모른다. 옷을 사려다 쓰고 있던 모자를 탈의실에 놓고 오는 엄마와, 수영모자를 챙겨 오지 않아 수영장에서 당황하는 나. 그렇지만 나는 허술한 내가 더는 부끄럽지 않다. 나랑 엄마가 같으니까.


엄마는 배영 발차기를 가장 즐겨한다. 요즘은 내가 띄워주지 않아도 킥판을 안은 채 혼자 벌렁 물 위에 눕곤 한다. 그러면 수면에서 움직이는 엄마의 굵은 발목. 나는 엄마를 꼭 닮은 내 발목이 더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엄마가 엄마인 것에, 내가 나인 것에, 더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봄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당시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교회를 그만 나가기 시작한 이후 이십몇 년 만의 일이다. 엄마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며 안산에서 서울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낯선 교회에 엄마를 혼자 가게 두고 싶지 않아 엄마를 따라가기로 한 게 내 '회심'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점점 엄마가 사랑하는 엄마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어 졌다. 나도 용서하고 싶었고, 나도 의지하고 싶었다.


30대의 엄마를, 내가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지켜준 엄마의 신앙에 대해 알고 싶었다. 교회에 가면 엄마는 눈을 꼭 감은 채 기도를 한다. 엄마의 기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나라고 한다. 나는 엄마를 지켜준 엄마의 신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그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나를 불쌍히 여길 신에게 뛰어들고 싶다. 내가 하지 못한 사랑과 용서를 엄마에게 허락한 그에게, 엄마가 수영장 물에 두려움 없이 눕는 것처럼.




처음엔 '복수'하고 싶어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 두고 봐, 내가 엄마 도둑 아니라고, 엄마가 맞고 꼬집혔다고, 내가 얘기할게, 엄마에게 몇 번이나 다짐했다. 하지만 마음이 도무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쓰는 내내 많이 울었다. 늘 나 자신의 감정과잉이 두려웠다. 엄마의 삶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엄마의 아픔보다 내 아픔에 대해 더 깊이 몰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스스로 후빈 상처인데도 덧난 곳을 건드릴 때마다 아파서 실은 많이 울었다. 글을 쓰다 말고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해 엄마, 나 너무 속상해, 하고 울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내 얘기를 다 들어주었다. 내가 엄마의 모든 얘기를 다 들어준 게 아닌데도.


늘 엄마와 멀어지는 게 내 삶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가족의 역사에서 해방되고 싶었고, 책에서 얻은 것으로 나를 단단히 지켜내고 싶었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었고, 엄마의 역사 바깥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향해 와르르 쏟아지는 엄마의 웃음이 때론 나를 살게 한다는 걸 안다. 엄마의 다정한 눈과 주름진 따뜻한 손과 굵은 손마디. 엄마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깊은 물에 잠길 수 있다. 계절이 익고 있다. 엄마라는 고유한 우주에 고이는 물. 우리의 물놀이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끝>


다음 포스팅으로 이 이야기에 관한 앞으로의 계획을 덧붙이겠습니다.

긴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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