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회귀일
열 살에 품은 꿈은 나를 오래 이끌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그것은 운명처럼 마음속 자리를 잡았고, 그 길을 향한 설렘은 대학 시절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과 달랐다. 가족의 곁에서 마주한 삶과 죽음, 책임과 한계는 나를 막막하게 했다. 결국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달래며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선택했다. 원래는 3년만 머무르려 했던 길이 어느새 34년이 되었고, 마음 한켠에 묻어 두었던 꿈이 다시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의 길을 걸었다.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남긴 편지, 메모, 작은 조형물과 초상화 속의 모습은 지난 시간을 환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 안에는 감사와 사랑, 그리고 나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가 담겨 있었다. 매일 마주하는 그 흔적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34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했다. 때로는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꺼내어 보게 하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뉴스 화면 속 의료진의 얼굴은 땀과 마스크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꺼지지 않았다. 환자를 향한 짧은 고개 끄덕임 하나에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면허증과 오래된 꿈이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마침내 9월 6일, 나는 오랫동안 멀리 있던 길의 문 앞에 섰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다소 어색하고 작아 보였지만, 내면 깊은 설렘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문을 밀었다.
처음 마주한 현실은 낯설었다. 손으로 하던 일은 기계가 대신했고, 환경과 역할은 훨씬 세분화되어 있었다. 오래 잠들어 있던 내 안의 에너지는 깨어날 듯 말 듯,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7시 30분 인수인계 시간은 하루의 시작이자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약 이름 하나조차 잘못 알아듣고 우왕좌왕하던 날, 동료의 짧은 눈빛은 말보다 더 날카롭게 다가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바로 그 순간이 나에게 다시 질문할 용기를 가르쳐 준 계기였다. 모르면 묻고, 실수하면 고치면 된다는 단순한 진실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지금 나는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배우고, 존엄과 사랑을 경험한다. 긴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길은 젊은 날 꿈꾸던 미래이자 지금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결코 길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계속해서 그 길 위를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마음이 준비될 시간을 기다렸을 뿐이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나 자신에게 말한다. “다시 걸어온 길, 34년을 지나 다시 만난 나.” 늦게 시작한 길이지만, 나를 지켜봐 준 이들이 있고, 기다려 준 시간에 감사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히기에 사라질 뿐이다.
삶의 현장에서 나는 지금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삶의 마무리와 존엄, 그리고 사랑을 배운다. 언젠가 맞이할 겨울을, 어르신들과 함께 미리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년 9월이 다가오면 마음은 설레고 떨린다. 9월 6일. 인생의 은빛 계절이 시작되는 날이자, 떠나 있던 시간들이 돌아와 나와 다시 만나는 날이다. 그날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34년 동안 흘러간 시간과 여전히 흐르고 있는 지금이 강의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맞닿는 순간이다. 나는 그 강을 건너며, 마침내 나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