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과 바다가 만들어 낸 하루의 풍경
태안이라는 지명은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지만, 정작 발걸음으로 닿은 적은 없었다. 꽃지해수욕장의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 그 너머의 태안은 늘 미지의 땅이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태안을 찾고, 수많은 기록과 사진이 그곳을 담아내는지 궁금해졌다. 올여름의 끝자락, 단순한 휴양이 아니라 태안만의 풍경과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다.
태안반도는 수억 년의 지질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땅이다.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 고생대 태안층, 쥐라기 화강암이 차례로 자리 잡으며 오늘날의 반도가 되었다. 백화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냉천골의 계곡은 그 시간의 흔적이고, 방포 해변은 바람과 파도가 수천 년 동안 빚어낸 무대다. 이렇게 하루의 여정을 정했다. 꽃지를 지키는 할미·할아비 바위 또한 그 땅의 깊은 이야기를 품은 채 바다 위에 서 있었다.
태안 백화산 자락 냉천골로 향하는 길. 집 지붕 위 햇빛에 반짝이는 태양열 패널이 잇따라 스쳐간다. 갓 튀긴 꽈배기 향이 바람에 실려 오고, 양쪽으로 뻗은 나무들 사이로 흰 구름이 흘러가며 마을의 일상과 함께 계곡으로 스며든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펜션과 카페가 이어지고, 시원한 물소리와 산길은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계곡에는 매미 울음과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 흐른다. 돌무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아이들의 손길,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방아깨비, 풀 위의 사마귀, 날아가는 메뚜기까지 작은 생명들의 세계가 계곡 속에서 펼쳐진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로 이름 없는 계곡을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냉천골의 물은 특이하게도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른다. 오래전 사람들은 이 동류수에 몸을 씻으며 여름의 무더위를 달랬다. 여름철 유두일(流頭日)에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면 부스럼과 땀띠가 사라지고, 액운과 마음의 무거움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고 믿었다. 단순한 목욕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정화의 의식이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를 적시자, 나 또한 그 믿음 속에 서 있는 듯했다.
냉천골 계곡을 뒤로하고 방포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꽃지를 지키는 할미바위와 할아비 바위는 외로움과 애틋함을 안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설 속 여인의 기다림이 머무는 바위 곁 맑은 바닷속에는 파란 고리문어가 숨어 있다. 여인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위협을 느끼면 선명한 푸른 고리를 드러낸다. 이 작은 파수꾼은 갑각류와 작은 물고기의 수를 조절하며 해양 생태의 균형을 지킨다. 모래 사이에 남긴 자취는 또 다른 생명의 보금자리가 되고, 마치 여인과 나눈 속삭임처럼 고요히 남아 있다. 바다는 신령의 숨결처럼, 작은 문어 한 마리에도 생태의 질서를 담아두었다. 오늘의 해안 풍경과 전설은 그렇게 맞닿아, 자연의 경이로움을 속삭인다.
오랜 세월 파도의 해식작용에 씻기고 다듬어진 몽돌은 모래와 나란히 놓여 해변을 이룬다. 둥근 몽돌은 여인의 기다림처럼 단단하면서도 고요하다. 발끝에 스미는 모래는 파도의 호흡처럼 부드럽다. 발끝에 닿는 모래와 몽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파도의 리듬 속에 살아 숨 쉬는 작은 문어의 존재는 잊히지 않는 여인의 숨결처럼 바다의 품에 겹겹이 남아 있다.
해풍을 견디며 뿌리를 깊게 내린 모감주나무는 척박한 모래 토양에도 적응해 숲을 이루었다. 세대를 이어 서로를 지켜주며 군락을 형성한 나무들 사이에서, 한여름의 노란 꽃잎이 진 자리마다 초록 열매가 계절의 변화를 전한다.
바람과 파도의 리듬 속에서, 자연과 바다가 만들어낸 질서는 나의 시간과 겹쳐지며 하루의 여운을 길게 머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