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술이 먹고 싶은 날
비 오는 아침,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주문판 옆 '모주'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막걸리에 한방 재료를 넣고 끓인 술. 알코올 1%라는 설명을 읽는 순간, 오래전 이모가 따라주던 달콤하고 시원한 단술이 떠올랐다. 그 단술은 내게 여러 기억을 불러왔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이모 집에 오래 머물렀다. 언니와 이모부 밭에 새참을 나르곤 했는데, 그때 이모가 따라준 단술은 옅은 갈색에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만큼 걸쭉하고 달콤했다. 반사발에 담긴 단술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술인데 왜 술맛이 나지 않고 단 죽 같지?' 반 사발 정도 먹은 후 잠이 몰려왔다. 잠시 눈을 붙였는데, 이모는 내가 술에 취했다고 했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던 아버지를 배반하듯, 그렇게 난 술과 첫 입맞춤을 했다.
직장생활 2년 차이던 어느 월요일 아침, 선배가 사무실로 불렀다. "아주 맛있고 시원한 음료수를 줄게." 컵에 담겨 나온 것은 설탕을 넣고 끓인 달달하고 시원한 막걸리라고 했다. 나는 그 음료수를 어린 시절 이모 집 단술과 착각하고, 의심 없이 한 컵을 원샷했다. 알코올은 또 그렇게 시원함과 달달함의 옷을 입고 다가왔다.
빈속에 달달한 음료를 들이켠 나는 이내 얼굴부터 몸까지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선생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어요. 거울 한 번 보세요." 거울을 봤다. 얼굴이며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삶은 문어처럼 얼룩달룩한 내 얼굴이 스스로도 낯설어 당황스러웠다. '이러다 1교시 수업에 들어갈 수 없으면 어쩌지….' 다행히 선배의 도움으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1교시 수업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속삭였다.
“어? 선생님 얼굴 왜 저래요? 정말 하얘졌어요!”
“근데 눈 밑은 시퍼래… 좀 무서운데?”
“선생님, 뱀파이어 같아요!”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무심한 척, 손바닥으로 볼을 철썩 때렸다.
“그래도 하얘요.”
“그럼 피 돌라고 더 세게!” 철썩철썩—
아이들은 더 크게 웃었다. 어떤 아이는 “선생님, 그래도 하얘서 예뻐요!” 순간, 내 행동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 덕분에 긴장도 풀리고, 어색했던 교실 공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날 나는 교단에서 문어로 시작해, 뱀파이어로 완성된 배우가 되었다. 덕분에 교단이 아이들과 더 가까워진 무대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웃음은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부끄러웠으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오히려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날, 내가 빈 속에 달달하고 시원한 막걸리 음료수를 마셨다는 걸 알까.
40년이 지난 오늘, 콩나물국밥집에서 본 모주를 보며 깨달았다. 선배가 건넸던 달달한 음료에 한방 재료와 색이 더해진 것이 바로 모주였다. 그날, 나는 한약재가 빠진 모주를 마셨던 것이다. 모주 향은 바람을 타고 지나온 희로애락의 시간을 살포시 덮는다. 매미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늘 아래에서 마시던 달달하고 걸쭉한 단술. 지금도 그 여름날의 단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