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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Sep 14. 2022

처음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미안함

식탁의자에 앉은 조카를 바라보며 아이였던 조카를 업고 길을 걷던 밤을 떠올린다. 살던 집과 도보로 이 십여 분 걸리는 동네로 이사한 후에 다섯 살이던 조카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울먹였다. 어둑해지는 가을밤. 조카아이를 업고서 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갔다. 싸늘한 공기 속 날벌레 형상이 비치던 긴 가로등. 도로가 차들의 경적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던 불빛.

“친구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응”

조카아이의 얕은 숨소리와 체온으로 전해지던 온기.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자리가 나서 앉으라고 하면 이모도 다리 아프잖아, 내게 자리를 양보하고 대학 합격 기념으로 동생과 조카아이와 옆 동네에 버스를 타고 가 피자를 처음으로 먹은 날은 익숙하지 않은 음식으로 구토를 해서 나와 동생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밥을 먹고 난 어느 여름날에는 상의를 가슴 위로 올리고 올챙이배를 보이며 만족한 듯이 가만히 누워있는 아이가 눈에 보였다. 배 아프다고 옷을 내려주면서도 아이의 충만한 미소에 나 역시 덩달아 평온한 웃음을 지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는 놀이터에 가서 셋이 배드민턴을 치고, 결혼 후 조카아이가 신혼집에 놀러 왔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는 말에 코코아라고 대답해 남편과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병원에서 태어난 후 엄마(내게는 언니)와 떨어져 우리 집으로 온 조카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직장으로 언니가 돌아갈 때면 조카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앙’ 크게 우는 울음이 아니라 말없이 눈물만 글썽이던 울음을.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게 주고 언니가 직장으로 돌아간 날. 엄마와 헤어지며 눈물을 글썽이던 조카아이를 보며 놀이공원에라도 가야지, 하다가 어영부영 나는 혼자서 그 돈을 다 써버렸다.


정맥이 비칠 듯한 흰 피부와 사심이 담기지 않는 말간 눈빛이 어린 시절 그대로인 스물다섯 살 조카아이. 이제는 말 수 적은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다.


어느 순간 눈 떠보면 스물다섯 살 말 수 적은 성인이 되어 아이들이 내 앞에 앉아 있을지 모르지. 내게 남은 건 함께 있었던 추억과 더 사랑하지 못한 후회뿐일지도.


자주 손을 붙잡고 걸어 다닐걸, 더 많은 시간 함께 있을걸.

두세 정거장 짧은 나들이에도 눈을 빛내던 아이가 있었는데.


처음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미안함이 현재를 깨우는 종소리가 되어 귓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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