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 가는 길

by 북남북녀

남은 약제로 두 번째 사용했더니 실패했다. 1제와 2제가 섞여 있는 제품으로 펌프를 눌러 빗에 묻혀 빗어주기만 하는 염색약. 첫 번째는 내 서투른 빗질에도 새치를 검게 덮어주었다. 보관 후 사용이 가능하대서 두 달 후 한 번 더 사용했더니 기술의 부족인지 제품의 변형인지 이게 뭐야, 가르마 쪽이 하얗네라는 말이 나왔다. 마침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 선물로 미용실은 어떨까, 남편에게 물었다.

그러든지. 남편이 흔쾌히 동의해서 토요일 오전,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의 나무보다 건물이 많은 동네로 가뿐하게 길을 나섰다.


자주 보는 일광욕하는 고양이들을 지나고 좁은 인도를 지나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지나고 신호등을 건너 저 앞에 역이 보인다. 귀엽고 아담한 역. 부담 없이 친숙하다. 역이 사람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꾸밈없이 소박하고 편안하다. 있는 그대로의 느낌.


땡그랑, 종소리를 들으며 미용실 문을 연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의 발랄한 미용사가 생긋 웃으며 맞아준다. 예약을 하고 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염색에 들어간다. 미용실에서 읽으려고 챙겨 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의 나긋나긋한 문체와 미용실에서 나오는 달달한 사랑 노래와 살에 닿는 시원한 에어컨 공기. 발랄한 미용사가 부드러운 손길로 샴푸까지 끝마치니 머리에서는 은은한 향이 맡아지고 머릿속까지 시원해진 느낌이다. 개운하네. 호사스러운 토요일 오전이야, 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가까이 사는 동생이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동생을 기다렸다. 동생이 올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도 하면서. 거리에서는 또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불빛 아래 촛불 하나
와인 잔에 담긴 약속 하나
항상 너의 곁에서 널 지켜줄 거야
날 믿어준 너였잖아


흥얼거리게 만드는 노래. 동생을 만나서 와인이 아니라 시원한 맥주를 먹으러 치킨집으로 향했으나.


해가 한 중앙에 떠 있는 시간. 동생과 나는 빨간 매운 양념치킨에 차가운 컵에 담긴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뒀다.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은 매번 만나고 자주 통화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궁금해하는데, 우리가 딱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들을 나눌 뿐. 의식하지 않고 그때, 그때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나를 대하듯이 편안하다. 옳은 얘기든지, 아니든지, 슬프든지, 아니든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로 듣는다. 흐르는 물처럼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 훅 하고 서 너 시간이 훌쩍 지난다.


음, 좋다. 해 쨍한 시간의 차가운 맥주도 땀나는 맛의 매콤한 치킨도. 흘러나오는 노래도, 염색으로 개운한 머리도. 생일 선물을 제대로 받았네, 흐뭇한 날


집에 돌아와서 길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검색한다. 귀에 들어왔던 ‘와인 잔’과 ‘변하지 않을게’라는 문장을 넣어서. <아로하>라는 제목의 노래. 미용실에서도 들려왔던 노래


어두운 불빛 아래 촛불 하나
와인 잔에 담긴 약속 하나


음, 역시 좋다. 왜 와인이지, 맥주나 소주 면 분위기가 안 살아서 그런가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하면서 오랜만에 사탕 느낌 나는 달달한 노래를 들었다. 새치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군, 우리도 이럴 때가 있었나 말랑말랑 해지는데 이 좋은 흐름을 책이 깼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을 마저 다 읽어갈 때쯤 욕이 나왔다. 나쁜 놈! 마음이 변했으면 상대방에게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어영부영 넘기려 하다니. 돈까지 빌린 주제에. 백만 개 욕을 부르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때로는 책 보다 현실이 살만하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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