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이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꼭 만나야 할 사람, 딱 한 사람 정해진 사람이. 같이 다니는 서너 무리의 친구들은 삶을 경탄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렸지만 지쳐있었다.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여러 일들에 일찌감치 노인의 마음을 품었다. 사람은 조금은 피곤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 함께 하는 상상은 달콤하기도 했지만 극도의 피곤함도 몰고 왔다. 그 나이 때의 호기심으로 우리는 장차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라는 주제로 많은 얘기를 쏟아냈지만 결론은 혼자 살아도 괜찮아 라거나 만나야 한다면 그냥 한 사람, 딱 만나야 할 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였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도 상상이 잘되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을 거친다는 것도 피곤했다. 그 시절, 지금 생각하면 풋풋한 십 대지만 그 당시는 다 늙은 사람처럼 피로했다. 사람 한 명을 만나는 일이 짊어지는 짐가방 하나가 더 생기는 것처럼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얀 벽지가 발라진 커다란 방 안, 여러 명의 형제들이 앉아 있다. 교회에서 보는 형제들로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나는 그중의 한 형제에게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그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형제 옆에 앉아 형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어깨에 기대어 눈을 뜨면서 푹 잤네, 생각했다. 머릿속이 개운했다. 그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형제가 내 말을 막으며 쪽지를 건넸다. 쪽지에는 세 개의 숫자가 일렬로 적혀 있다. 이게 뭘까, 생각하다가 눈을 떴더니 내 방 침대 위였다.
희한한 꿈이네, 생각하면서도 꿈속에서의 평온했던 잠이 떠올랐다. 꿈속이지만 아주 달게 푹 잤다. 그 당시의 나는 저녁마다 열리던 교회 선교 기도회에 열심이었고, 3월이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먼저 입학했던 대학은 접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가게 된 대학이다. 기도회나 대학 입학에 관련된 꿈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선교 기도회를 이끌어가는 리더 언니에게 혹시나 싶어 꿈 이야기를 했다. 생생했다는 말도 덧붙여서. 꿈 이야기를 들은 언니가 하나님이 너에게 형제를 주시려나 봐,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준비했던 일이 잘 풀려 학교에 들어가는 시기에, 새롭게 인생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형제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주변 사람들 역시 나를 보면 독신의 은사가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쪽 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말하면서 언니와의 대화가 마무리됐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꿈속의 형제에게 전화가 왔다. 집 앞인데 잠깐 나와줄 수 있어? 어스름한 저녁 무렵의 주택가 골목을 꿈속의 형제와 걸었다. 형제는 짙은 녹색 점퍼를 입고 앞머리가 길어 눈을 덮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꿈속의 형제가 주머니에 푹 손을 꽂고서 저만치 앞에서 걸어갔다. 나는 그 형제의 걸음을 쫓기가 힘들어 조금 늦게 걸으면 어떻겠냐, 물었고 형제는 그때야 자신의 걸음이 빨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뒤로는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걸었다.
7년 동안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어. 이번에 그 사람이 나와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와는 마음이 잘 맞을 거 같아. 우리가 한번 만나 봐도 좋을 거 같은데.
꿈이 생각났다. 교회 언니의 형제를 주시려나 봐, 라는 말도 떠올랐다. 그러자 심각해졌다. 꿈속의 형제는 친한 친구가 마음에 둔 사람이다. 친구가 그 형제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친구의 사랑을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아니요, 라는 말을 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 역시 혼자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었고 지금 내 앞에서 고백하는 형제와의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달을 말했다가 형제의 눈빛이 다급해 보여 일주일을 다시 말했다. 꿈속의 형제와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딱 한 사람이었다. 내가 신께 구한 게 있다면. 내 눈은 믿을 수 없으니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신께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그리고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꿈속의 형제에게로 발을 떼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있던 다른 사람(감정)을 놓아야 하고, 친구의 가슴에는 비수를 꽂아야 했다. 나는 선택했다. 친구의 눈에서 눈물을 뽑고 내 감정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새로운 땅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집 안에 양가 어른이 모였다. 어른들이 둥그렇게 앉아 우리의 결혼을 이야기한다. 눈 뜨니 꿈이었다. 결혼할 때가 됐구나, 생각했다. 그 해 시댁 어른의 퇴직과 여러 사정이 겹치며 우리의 결혼은 확정됐다. 막상 실제 상견례 자리에는 꿈속에서와 같이 모두 모이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일이 밀린다며 오지 못한다고 연락이 와서 엄마는 앉은자리에서 좌불안석이 됐다. 동생과 나와 엄마, 꿈속의 형제와 그의 부모님은 해물 뷔페 집에서 만나 새우를 까먹으며 결혼 날짜를 잡았다.
<광식이 동생 광태>라는 영화에서 오래 짝사랑하던 상대를 잃은 주인공 남자는 인연이 나타나면 종이 울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종이 울린다.
지금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종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인과 타인이 함께 평생을 살겠다는 굉장한 선서를 할 수 있을까. 우리 역시 여러 사람 앞에서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선서를 하고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