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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도피하다 02화

도피2

조금은 유연하고 따듯한 얼굴로

by 도피

1. 조금은 유연하고 따듯한 얼굴로

조금은 유연하고 따듯한 얼굴로

월요병에 허덕이던 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밥 먹자고.

오늘은 반드시 집에서 푹 쉬리라 다짐했던 터라 반갑지는 않았다.

근데 밥을 사준다고 한다. 메뉴는 장어란다.

음 덜 피곤한 것 같은데 내일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덜컥 약속이 생겼다.


지하철을 타고 집과는 점점 멀어졌다. 사람은 어찌나 이렇게 많은지.

처음 보는 사람들의 찡그린 미간애 끼어 둥실둥실 약속 장소를 향해 갔다.


그렇게 약속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을 했다. 그런데 늦는단다.

한 친구는 회사일이 늦게 마쳐서. 다른 한 친구는 같이 출발하려 했는데 친구가 늦어서


40분 정도 떠버린 시간. 난 불쑥 화가 났다. 어디에 있더라도 애매한 시간. 부랴부랴 근처 카페를 찾아 씩씩대며 들어갔다. 특이하게 군고구마를 구워 내오는 카페였다. 젊은 사장님은 친구와 요란스럽게 수다를 떨고 계셨다. 괜히 멋쩍게 틈에 끼어 커피를 주문하고 옆 책장을 찬찬히 보았다. '하필 늘 들고 다니던 책을 두고 온 날 이런 시간이 생기다니',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보는데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들이 보였다. 액자처럼 꾸며진 그 책들은 꽤 빳빳했다. 오. 40분이라는 시간에는 걸맞지 않은 사치라 넘겨두고 낯익은 한 뼘 남짓한 월간지를 들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시시한 이야기. 각종 생필품 소개들을 보다 한 글귀가 툭하고 눈앞에 떨어졌다.


‘뜨거운 태양도 저무는 시간에는 표정을 바꾼다. 모든 사물을 감싸듯 조금은 유연하고 따듯한 얼굴로’


미뤄진 40분이 오늘의 내가 저무는 시간이었나 보다. 자세를 고쳐 앉고 깊이 이야기에 빠질 준비를 할 때 이야기를 뚫고 전화가 왔다.


다 왔어. 제일 끝 구석에 있을게.


빳빳해진 허리를 풀며 대답했다.

구석 좋지. 금방 갈게.



P20240916_173232270_07CAEA0D-E288-4E8E-B754-4729083DDD8F.JPG 무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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