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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도피하다 04화

도피 4

참 덧없다

by 도피

20대 중반, 잠시 한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다.

시험과는 무관한 과목이었기에 아이들은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수업을 들어주었다.

물론 너무 내려놓아 무언의 선을 넘는 작은 소동들이 있었지만 그 시기에 일어날 법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체로 평온했던 시간들이었다.


그중 남다른 평온을 느꼈던 날이 있다.


1교시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1교시에 맞춰 가려면 일상의 시계를 두 바퀴 정도 당겨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하루를 힘껏 당긴 뒤 시간에 맞춰 교실에 들어갔다. 허나 다른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핸드폰을 켜 연락을 확인하였다. 시간표가 변경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좀 일찍 연락해 주지' 불평하며 어울리지 않는 여유를 맞이했다. 무려 6시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과 마음이 녹록지 않았던 터라 근처 여유의 조각들을 모아 보기로 하였다.


우선 학교 앞 핑크색 간판의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핑크와 제법 어울리는 털보 사장님이 계셨다. 커피를 주문했다. 사장님은 친근히 말을 걸으며 쿠키를 건넸다. 예기치 못한 친절에 흠칫 놀랐으나. 손은 이미 쿠키를 받고 있었다. 그러곤 도장이 두 개 찍힌 쿠폰을 나에게 건넸다. 다시 올진 모르겠으나 오늘을 기억하고 싶어 쿠폰을 받았다. 커피를 받아 들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친한 형이 생각났다. 그 형네 집에 가서 눈 좀 붙일까 하여 전화를 했다.

이전의 상황설명은 제쳐둔 뒤 섣불리 물어보았다.


'형, 나 형네 집에서 좀 자다가 나가도 돼?'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과 같았다.


'응'


또렷한 대답이었다.

이후 희미한 말이 들렸다.


'내가 배가 좀 아픈데, 배탈약 좀 사다 줄 수 있어?'


난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선명히 대답하였다.


'응'


그렇게 형네 집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 버스가 왔다. 아직 커피는 많이 남아있던 터라 이번 버스는 보내주기로 하였다. 한 모금씩 커피를 마시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여유를 충분히 마신 뒤 형네 집 앞 약국에 도착했다. 배탈약을 달라고 한 뒤 주섬주섬 나가려던 차에 벙긋거리는 약사의 입이 보였다. 이어폰을 뺀 뒤 다시 말해달라는 눈으로 약사를 쳐다보았다.


'혹시 커피 많이 드시나요?'


'네, 왜요?'


'커피 많이 드셔서 배가 아프신 걸 수도 있어요'


약 값에 비해 과분한 친절을 받은 것 같아 연신 고개를 숙인 뒤 약국을 나왔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형이었다.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멘 채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었다. 도서관에 간단다. 그럼 나는? 집에서 편하게 쉬고 가란다. 이불 깔아 뒀다고. 구깃한 약봉투를 건네준 뒤 형네 집으로 향했다.


참 덧없다.



P20211213_140248000_35C4A145-6751-457A-A457-9DD9C556FAA1.JPG 무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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