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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Oct 03. 2024

마지막 보고서

29회

상윤보다는 일 년 늦게 연방정부 총무처가 주관하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진숙은 꿈에 그리던 연방정부의 5급 사무관이 되었다.

2033년이 끝나갈 무렵 신입공무원 연수교육을 마친 그녀가 받아 든 첫 발령지는 놀랍게도 정 위원장의 관사였다.

연방정부차원에서 정 위원장을 보다 더 세심하게 보필할 목적으로 집사공무원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영민하면서도 매사에 진중함을 잃지 않던 진숙이 가장 어려운 보직을 수행할 첫 연방공무원으로 낙점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물리치고 따듯한 봄의 기운이 찾아오듯 대고려연방의 정국도 모처럼만에 안정기를 구가했다.

2034년 3월의 태양은 얼어붙은 대고려연방의 대지를 깨우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만큼은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간 채 온종일 서재에서만 지냈다.

2년 전 인민공화국 정부가 해산되고 부부의 손으로 가꾸기 시작한 마당의 정원도 이제는 흥미를 잃었던지 일손 보태기를 마다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원 가꾸기에 분주한 부인의 모습을 멍하니 서재에서 바라만 볼 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대문 밖은 또다시 억울한 사정들을 호소하는 각종 민원단체들이 북쪽 전역에서 밀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관저의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연방경찰들은 이들의 진입을 막느라 온종일 진땀을 흘렸다.


작년 가을 정 위원장의 결단으로 헌법재판소 문제가 마무리된 후 평화가 찾아온 듯했지만 그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닌 일시적인 평화였을 뿐이다.

대문 밖의 소란은 이젠 거의 일상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오늘도 종업원지주사로 전환된 식료품 제조사의 종업원들이 떼로 몰려와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거래하던 남쪽기업의 갑질 횡포로 회사가 도산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의 운영시스템에 미숙한 북쪽의 종업원지주사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둘 남쪽 기업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되어갔다.

이런 사건들은 이제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뉴스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만연해 있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났던 부동산사건 이후 남쪽사람들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민심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북쪽 사람들의 정 위원장에 대한 의존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정 위원장의 관사 앞에는 늘 이렇게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민심의 집합소가 되어갔다.

이들이 들고 나온 현수막들 가운데는 급기야 통일을 후회하는 문구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자칫 정 위원장의 관사가 반통일의 진원지로 인식될 수도 있어 정 위원장은 지금 이 같은 난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장고에 들어갔다.


정 위원장 내외가 막 아침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무렵 곽 사령관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위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박철, 이 치졸한 자식이 위원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도용해서 이따위의 전단지를 뿌려 대고 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북조선재건회의 간부들을 불러서 격려했다고 하는 전단지입니다,

오해하는 인민들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전단지를 불끈 쥔 정 위원장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박철, 이 놈이 기어이 날 사지로 몰아넣고 있단 말이지,

어때! 퇴역 장성들의 분위기가 지금 어떻냐 말이야?”

심기가 불편해진 정 위원장이 다그치듯 묻자 경직된 표정의 곽 사령관이 군기가 바짝 들은 차렷 자세로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군원로들은 총사령관님께서 재건회의에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고 믿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사건 이후 총사령관님께서 연방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믿는 자들이 늘어났는데 총사령관님께서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는 전단지까지 뿌려지자 사실로 믿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정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내 신세가 고작 박철 따위가 가지고 노는 노리개 신세로 전락되었단 말이지!”

정 위원장의 자조 섞인 푸념소리에 화들짝 놀란 곽 사령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철이 놈을 제외하면 총사령관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인민들은 단연코 아무도 없습니다!”

“됐어! 당신한테 그런 소리나 듣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정 위원장은 또다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어금니를 깨어 물었고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겨우 진정시켰다.


정 위원장이 북조선재건회의를 추인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렇게 되자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재건회의에 가입하려는 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월이 되어서는 북조선재건회의가 자치주의 군 단위에까지 지부를 둘 만큼 그 세력이 확산되어 갔다.

적어도 북쪽 다섯 개 주에서는 연방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반연방 시민단체로 급성장했다.   


백두산의 서문, 장백산천지회의 왕 회장 사무실은 요즘 들어서 부쩍 활기가 넘쳐나고 있다.

북경의 늙은 능구렁이 허 원장을 제치고 왕 서기라는 상무위원과 직접 소통하고 있었으니 이제 그들 앞에는 그칠 것이 없었다.

5년 전 배은하가 장백산을 넘어 대고려로 도망쳤을 때만 해도 사실상 조직이 될 위기에 놓였다.

정 위원장까지 직접 나타나 중국을 격하게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벌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실제로도 엄청났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완전한 포기를 선언해야 했고,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가르치던 중국아이들의 역사교과서도 다시 쓰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 조작 현장까지도 원상으로 복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허 원장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북경과의 유일한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동북 3성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하던 왕 회장의 신세도 그야말로 알곡이 빠져버린 쭉정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쯤 되었으니 장백산천지회가 무사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적어도 동북 3성 일대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웬걸 허 원장의 뒷배를 봐주던 왕 서기가 직접 연락을 해와서는 제법 쏠쏠한 일거리를 맡겼다.

대고려연방령인 장백산의 동문일대에서 둥지를 튼 박철에게 자금이라던가 각종 물품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이건 뭐 식은 죽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단순히 명의만 빌려주고도 중간에서 이것저것 뜯어먹을 수 있는 구전도 두둑하여 왕 회장으로서는 거의 횡재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반면에 북경의 왕 서기는 허구한 날 전화질을 해대는 왕 회장 때문에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방금도 이 작자의 청탁전화를 받았는데

‘지시하신 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우리만 탁 믿으시고 상무위원님은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부탁드린 거 그것도 좀 빨리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한낱 지방의 삼합회 두목 따위가 감히 공산당의 중앙 상무위원을 대하는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보니 당국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 다소 골치는 아프더라도 천지회를 앞세워서 박철의 사업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예기치 않은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이 단체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왕 회장이란 작자가 날이 갈수록 오만방자한 본색을 드러내고 있어 성질 같아서는 확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중요한 시점에서 그럴 수도 없어 꾹 참고 있었다.    


해가 바뀌기 전, 꼭 한번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은하의 간곡한 요청이 성사되었다.

특별히 성탄절 이브를 골라서 역전의 미니탐험대가 은하부부의 서울아파트를 찾았다.

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작은 아파트였지만 이 집 안주인의 차분한 성격답게 전반적으로 집안 분위기가  편안해 보였다.

소박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성탄절 츄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남산타워의 조명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거실 한가운데를 떡하니 광대한 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큰 상 하나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들에 대한 이 집 안주인의 마음인 듯 차라리 잔뜩 힘을 주고서 버티는 상다리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자신들의 짝들과 함께 쌍쌍이 둘러앉은 손님들은 계속 나오는 음식들 앞에서 더 이상은 놓을 자리가 없다며 하소연하는 지경이 되었다.

경은과 진숙이 은하를 도우려 일어서려고 했지만 기어이 자리에 앉히며 은하가 하는 말이다.

“오늘은 그냥 많이 드시고 편히 쉬다가 가는 것이 날 도와주는 거니까 꼼짝들 말고 자리에 앉아 있기예요”

경은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윤 소장과 은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모님의 정성이 담긴 음식이니까 맛있게는 먹겠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너무 고생하셨어요!”


이때 넉살 좋은 규태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특유의 입담을 자랑했다.

“아이고 이모님! 우리가 어데 넘이던교?

이래까지 안 해도 되는데 진짜로 상다리가 뿌사질라고 하네요!”

경은이 규태의 볼통한 볼살을 두 손으로 당기면서 익살스럽게 말했다.

“넘이 아니니까 상다리가 뿌사지도록 준비하셨겠지!”

두 경상도 선남선녀의 입담에 모두는 폭소를 터트렸고 한참을 따라 웃던 진숙이 재촉하듯 은하에게 말했다.

“이모님! 이제는 정말로 더 놓을 자리도 없습매다,

여기로 와서 우리랑 같이 앉으시라요,

이모님이 여기에 앉으셔야 우리가 편히 음식을 들지 않갔습니까?”


진숙의 성화에 은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 소장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때 규태가 너스레를 떨면서 포도주병의 마개를 땄다.

내가 오늘 큰 맘 묵고 서울 백화점 와인코너를 다 가봤다 아입니까!

왔다야 이놈 빛깔 한번 보소? 끝내주지요!”


포도주병의 마개가 개봉되자 규태가 먼저 윤 소장 내외에게 잔을 채우려 했지만 윤 소장이 제지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우리 부부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귀한 손님들에게 먼저 잔을 따르는 것이 대접하는 사람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규태로부터 건네받은 포도주병을 받아 들고서 일일이 손님들의 와인 잔에 채워주었다.

마지막으로 남게 된 주인부부의 잔은 은하의 옆자리에 앉은 진숙이 따르면서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고 보니 함께 백두산을 오르던 생각이 떠올라서 감개무량합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모님!”


진숙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한 규태가 또 불쑥 끼어들었다.

“그 왜 백두산흑곰한테 쫓기던 생각은 안 나네?

그때 내가 육포 한 덩이를 던져주지 않았으면 우린아마 진즉에 잡아 먹혔을 거야! 그렇지 않네? 진숙동무!”

경은이 또다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오빠래 순 공갈쟁이 아닙니까?

곰이 아니라 백두산 멧돼지였어요!

정월 엄동설한에 동면에 들어간 곰들이 어디를 싸돌아다닌답디까? 공갈쟁이 동무!”

멋쩍은 표정으로 규태가 다시 대꾸했다.

“아참! 그때 우리를 구해준 중대장 동무가 백두산흑곰이었지, 동무들 내가 착각했수다!”


규태의 제안으로 모두가 잔을 들었다.

짠하고 모두의 잔이 부딪쳤고 왁자지껄한 만찬이 시작되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집 아파트의 거실은 특별한 사연을 지닌 이들이 성탄절 이브의 만찬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훌륭했다.


은하는 5년 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장백산천지회의 지하창고에서 자신을 구해준 장면이 떠올랐을 땐 절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급히 화장지 한 장을 꺼내든 은하가 한 명 한 명 고마운 은인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 감수성 예민한 경은이 은하의 상념을 눈치챘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이고 보니까 이모님이 당시의 백두산 고행기가 떠오르셨나 봅니다, 그렇죠! 이모님?”

모두의 이목이 잠시 은하에게 주목되자 은하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고행기라면 고행기가 맞겠죠,

그런데 난 고생했던 기억보다는 여러분들을 만나서 오히려 행복했던 기억들이 더 많답니다,

호텔 지하창고에 갇혀 있었을 땐 분명히 악몽이었지만 극적으로 여러분들을 만나고부터는 오히려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여러분들 덕분에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잖아요?”


저녁식사를 마친 후 번잡스럽게 광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큰 상을 규태와 상윤이 번쩍 들어서 부엌으로 이동시켰다.

비워진 거실에는 아담한 다과상이 차려졌고 손님들의 와인 잔에는 이 집의 주인에 의해서 일일이 내용물이 보충되었다.

“다들 알겠지만 연방의 돌아가는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좋지가 않아요!”

윤 소장이 잠시 뜸을 들이던 사이 규태가 불쑥 끼어들면서 부연설명을 자처했다.

우리 내부적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 같은 것이 보인다고나 할까요?”

결과적으로 이 모두가 일본과 중국의 반격으로 빚어진 일이지 않습니까?

특단의 대책을 세워서라도 하루빨리 이 위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연방정부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던 상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연방정부는 과거 남북한의 정부에 비하면 너무나도 힘이 없습니다,

연방대통령님을 뵐 때마다 그분의 처진 어깨가 눈에 밟혀서 하루종일 우울하다는 연방공무원들이 많은 실정입니다”


다음 차례는 진숙이었다. 모두의 얼굴이 자연스레 진숙으로 모아졌지만 진숙은 한동안 남산타워의 불빛만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생뚱맞은 침묵이 어색했던지 진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 위원장님은 일없어십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위원장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십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흔들어대는데도 미동 하나 없이 굳건하십니다,

위원장님께서는 하루 종일 서제에만 계시지만 오직 연방의 안정을 위한 고민뿐이십니다,

하지만 위원장님도 인간이신데 어찌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밤낮없이 인민들이 몰려와서 저토록 아우성들을 치고 있으니 무척 힘이 드시는 건 어쩔 수 없단 말입니다”

진숙이 또다시 남산타워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감정이 북받친 듯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런데도 잘 이겨내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여사님이십니다,

여사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셔서 고것이 큰 걱정입니다”


진숙의 말문이 막히더니 급기야 눈에서 눈물까지 글썽이자 옆자리의 은하가 재빨리 화장지를 건네면서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모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진숙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줄 생각이었지만 한 사람만은 생각이 달랐다.

규태가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연방을 다시 갈라놓기 위해서 외세의 앞잡이들이 흔들어대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에 난 솔직히 엄청 화가 납니다!

 암덩어리들을 우리 사회로부터 완전히 도려내야 하는데 마땅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답답할 지경입니다!”


상윤도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번에 털어 넘기는 객기까지 보인 후 말문을 열었다.

“그나마 남쪽사회는 이전부터 여당과 야당 시민단체 간의 갈등구조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겨낼 면역세포가 충분하갔지만 북쪽에서는 이런 것들이 취약하단 말입니다,

전적으로 위원장님 한분에게만 모든 짐을 다 지우고 있으니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안 된단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길게 가면 좋지가 않지요,

조속히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윤 소장이 상윤과 진숙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서 난 북조선재건회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이제는 그 세력들이 북쪽 다섯 개 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어요,

정 위원장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예요,

날이 갈수록 통일을 후회하는 인민들은 늘어날 테고 그들이 모두 정 위원장을 압박하고 나선다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진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위원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도용하고 있어 위원장님의 운신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위원장님께서 모종의 결단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솔직히 두렵기까지 합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듣고만 있던 은하가 작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딱딱한 시국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만들 두시고요,

그나저나 사랑스러운 우리 두 쌍의 연인들은 언제나 좋은 소식을 들려주렵니까?

누가 먼저 말해볼래요? 어서요!”


은하의 재촉에 상윤과 진숙을 바라보던 경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린 뭐 아직 사랑이 덜 여물어서 그런지 앞으로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지만 진숙언니 네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언니까지 떡하니 연방정부의 사무관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 타이밍에 규태가 또 농담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사립대를 나온 우리도 못해낸 일을 상윤 동무와 진숙동무래 정말 대단들 합니다!”

규태의 실없는 농담에 모두 밝은 표정으로 한바탕 웃게 되자 경은이 다시 끼어들었다.

“공갈쟁이 동무래 진숙언니한테 남쪽에서는 등록금이 비싼 순서대로 명문대학이라고 뻥을 쳤다면서요?

알고도 속아주니까 이젠 아주 뻥치는 재미까지 붙었습니까? 동무!

이 두 사람은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출신들인데 어디다가 갔다 붙이는 겁니까? 넘볼걸 넘봐야지!”


진숙이 웃음을 그치고 살짝 부끄러운 표정으로 상윤을 바라보더니 이내 당찬 표정으로 전환했다.

“사실은 상윤 동무랑 다짐을 했더랬습니다,

연방이 안정을 찾으면 그때 가서 아주 편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올리자고요”

진숙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상윤이 진숙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안정되지 안 갔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곧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35년의 새해가 시작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담한 방식으로 토착 친일세력들의 대고려연방 흔들기가 시작됐다.

심혈을 기울였던 조상 땅 찾기 운동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지만 북쪽 사람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앙금의 생채기를 남겼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거의 빛의 속도로 연방의회가 선제적인 입법조치를 단행했고, 정 위원장까지 직접 나서 정면으로 맞대응하여 그나마 이 정도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연방은 또다시 절단이 나고도 남음이 있었다.  


쉼 없이 솟구치는 분수 물처럼 다케시마 수복결사대가 지원해 주는 자금들이 넉넉하게 쌓여갈수록 돈냄새를 맡은 토착 왜인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자신감을 얻은 신일진회는 이번 참에 아예 끝내기 승부수를 두기로 했다.

그동안의 아지트였던 광화문광장을 벗어나서 적진의 심장부인 평양 진격을 결정하게 된다.

다가오는 3월 1일을 ‘평양 대진격의 날’로 정하고 연초부터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3월 1일 오전 11시 놀랍게도 장소는 구 북한의 주석궁으로 알려진 금수산 태양궁전 앞 중앙광장이었다.


금수산 태양궁전이 어떤 곳이던가!

여기는 정 위원장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던 곳이다.

현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북쪽 다섯 개 주를 통틀어서 가장 엄숙한 공간이다.

신일진회가 하필이면 이곳을 콕 찍어서 결전의 장소로 선택했던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조치였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이참에 아주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는 막가파식 작전이었다.

그런데 대고려연방을 확실하게 뒤집어 놓기 위해서는 연방의 분열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닌 또 다른 단체의 도움이 절실했다.


신일진회와 북조선재건회의,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분열세력은 각자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상대의 존재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판때기를 먼저 깔아놓은 신일진회가 저들의 전략적 제휴 상대를 향해서 어서 오라고 손짓했을 때 잔머리의 귀재인 박철이 이 손짓에 곧바로 응답했다.

박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북쪽 다섯 개 주에 퍼져있던 북조선재건회의 조직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다가올 결전에 대비했다.      


2월 중순, 정 위원장이 다른 북측 위원들과 함께 국정자문위원회 정기회의에 참석차 연방정부청사에 들어섰다.

내외신 기자들의 빗발치는 질문 속에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꽉 다문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위원장님께서 북조선재건회의를 묵인하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3월 1일 주석궁 앞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예정돼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집회에 위원장님도 참석하십니까?”

“남과 북으로 다시 갈라선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통일을 후회하십니까?”


이 마지막 질문이 정 위원장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질문을 던진 연합통신사의 젊은 기자를 또렷이 응시했다.

“조국이 통일되고서  자신 민주주의 방식에 적응해 보려고 무진장 애쓰고는 있습니다만 참으로 어려울 때가 있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감내는 해야 갔지만 말입니다,

바퀴벌레 몇 마리가 나댄다고 새 집에 이사한 걸 후회하느냐고요?

차라리 새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퀴벌레를 모조리 밟아버리겠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기자양반!”

이 말을 남긴 채 정 위원장이 가던 길을 재촉하자 정 위원장의 기세에 눌려 새파랗게 질려버린 젊은 기자가 그제야 안도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회의에 임해서도 정 위원장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고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는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기자에게 했던 말속에서 정 위원장의 심경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대체 민주주의가 무엇 이관데 감히 주석궁 앞에서 ‘평양대진격의 날’이라고 명명된 반체제 행사가 버젓이 열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 바로 앞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공화국의 드높았던 위엄들이 땅바닥에 패대기치듯이 모독받을게 뻔히 예상됨에도 말이다.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집회허가를 취소시키고 불순분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서 중죄로 다스려야 했다.

그런데도 연방정부는 단지 집회허가의 요건이 충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인 집회로 인정해 주었다.

정 위원장으로서는 연방정부의 이런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연방정부와 평양시 당국에서는 사회혼란이 우려된다며 처음부터 일관되게 집회허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신일진회가 연방행정법원에 제기한 ‘집회금지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의 일부를 인용하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연방정부로서도 집회의 허가를 내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국정자문위원회 회의참석에 앞서 정 위원장이 했던 이 문제의 발언을 영악한 박철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북조선재건회의의 선전선동 문구에 재빨리 삽입되어서 정 위원장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사태가 엉뚱한 곳에서 크게 확산되어 나가자 진숙은 규태에 이어서 상윤의 전화까지 받아야 했다.

“내가 그렇게도 말하지 않았네?

위원장님의 진심은 일관되게 대고려연방의 안정을 바라시는 마음뿐이시라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단지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잠들어계시는 주석궁 앞에서 집회허가가 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하고 계시지만,

최근 들어서 위원장님 내외분은 거의 식사도 못하고 계셔!

여사님은 불안 증세까지 생기셨는지 안절부절못하고 계시고, 심지어는 조용한 데로 이민 가서 살자는 말씀까지 하셨단 말이야,

얼마나 괴로우시면 그런 말씀까지 하셨갔네!

방금 내가 한 말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꼭 너만 알고 있어라,

걱정이 돼서 참말로 내가 다 죽을 지경이야”  


그러나 진숙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상윤은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숙이 자신에게만 내밀하게 말했던 이 문제의 발언은 조심스럽게 윤 소장에게로 전달되었고 윤 소장은 주저하지 않고 삼일특공대의 긴급 과제로 상정했다.

과제의 제목은 ‘반통일 세력의 척결을 위한 대응책 강구’로 정해졌다.


통상적으로 긴급과제가 부여되면 팀원들의 기존 업무는 일체 중단되고 보고서가 완료될 때까지 외근은 물론이고 심지어 퇴근조차 금지되었다.

간간히 자신들의 업무 책상에서 쪽잠들을 자면서 하루 세 차례씩 진행하는 살인적인 고강도의 기획회의 자료를 축척해 나갔다.

기획회의는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전에 한 시간 내외로 진행되었고 돌아가면서 자신들이 작성한 초안을 발표하고 함께 토론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기획안보다도 타당한 기획안이 나오면 그 초안에다 자신의 주장을 가미하여 새로운 기획안을 만들어나가는 대단히 효율적인 작업방식이었다.  

기획회의를 거듭하면서 기획안의 내용물이 예리하게 가다듬어져 통일광장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의 칼날처럼 번쩍였다.


드디어 칠 일째 저녁이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다투던 기획안이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최종 기획안이 선정되었다.

일주일째 머리를 감지 못했던지 최종안으로 선정된 규태의 몰골은 차마 눈을 뜨고서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비슷한 몰골의 팀원들이 그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미소 짓던 규태가 오른손가락의 검지와 중지를 펴는가 싶더니 이내 테이블 위로 머리를 파묻고 말았다.  


7박 8일 만에 완료된 최종 보고서를 지참하고 장 팀장이 윤 소장의 방으로 들어섰다.

채 오 분 만에 십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내려간 윤 소장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투로 말했다.  

“사실은 나도 이와 같은 결론을 예상하고 있었어!

통일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우리 팀의 성격상 역시 대고려의 역동성이 담긴 이런 식의 결론이 마땅하겠지,

이만하면 됐어! 어쩌면 이 제안서가 우리 팀의 이름으로 내어놓을 마지막 보고서가 될 것 같군,

모두들 고생했어!”


보고서를 챙겨 들고 지체 없이 재단 건물을 빠져나온 윤 소장은 곧장 민 대통령의 성북동 자택으로 향했다.

보고서의 한 장 한 장을 떨리는 손으로 넘기던 민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가 굳어지기를 반복하는 심오한 표정이다.

민 대통령이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을 때 윤 소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통령님! 바로 지금이 반통일 세력의 뿌리를 도려낼 최적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민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화답했다.

“이번 참에 친일이든 친중이든 반통일 세력들을 일거에 도려내자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헌법 개정을 포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들을 압축적으로 과감하게 전개함으로써 이참에 반통일의 뿌리를 통째 도려내야 합니다!”

“윤 소장도 알다시피 난 본래 대단히 신중한 성격이었어요,

그런데 윤 소장 팀의 삼일특공대를 만나고부터는 내 성격도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래요 지금은 우리 삼일팀의 제안대로 이렇게 역동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 옳아요!

대고려연방의 상징인 큰 칼을 빼어 들고 말 달리는 광개토대왕식 해법으로 말입니다,

삼일운동 116주년을 맞이하여 이 보고서가 위력을 발휘한다면 하늘에서 광개토대왕과 이순신 장군께서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군요!”      


다음날 아침, 민 대통령은 연방대통령을 만나기 위하여 연방정부청사로 달려가는 중이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통일 후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안정기로 들어설 것이냐, 아니면 되돌아올 수 없는 분열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를 가를 대고려연방의 마지막 고비가 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내어놓은 삼일특공대의 보고서는 사실상 정 위원장의 생각을 그대로 풀어서 옳긴 것과 같았다.

통일 후 계속되던 내부의 혼란도 따지고 보면 생경한 민주주의 시스템에 북쪽사회가 잘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초래된 일이다.

규태의 접근방식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로 접근했다.

정 위원장을 위시한 북쪽의 인민들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일반이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고려연방의 상징 광개토대왕식 해법이었다.


민 대통령을 실은 고급 중형 세단이 경호 차량들의 호위 속에서 대고려연방의 수도 광개토대왕 특별시에 진입했다.

연방정부청사를 향해서 달려가는 차창 밖으로 어느새 삼백만의 거대인구가 상주하는 아름다운 신도시가 펼쳐졌다.

드디어 광개토대왕 시는 오매불망 바라던 자치주로의 승격이 이루어짐으로써 연방의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냈다.

이로써 연방헌법에 규정된 명실 공히 열두 개의 자치주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채 5년 전만 하더라도 흉물스러운 철조망 속에서 수백만 개의 지뢰들이 파묻힌 사람의 출입이 엄격하게 봉쇄된 봉금지대였다.

사람의 흔적대신 야생의 동식물들만이 천혜의 군락지를 형성했던 85년의 봉금지대가 이제는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별천지로 다시 태어났다.


이 고귀한 통일의 꽃봉오리를 우리는 자자손손 영원히 보존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리아평화공원을 또다시 흉물스러운 철조망에 둘러싸이게 할 수는 없다.

또다시 수백만 개의 지뢰가 파묻힌 죽음의 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음이다.

보다 더 단단해진 대고려연방으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고비일 뿐이다. 

이 고비만 잘 이겨낸다면 다시는 분열되지 않을 강철같이 단단한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방정부청사 3층에 위치한 연방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두 전 현직 대통령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민 대통령이 말하는 동안 연로한 연방대통령의 눈가에서는 촉촉한 물기가 묻어났고 손수건으로 눈가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정 위원장이 힘들어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사님까지…

세상에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그런 민망한 말씀까지 하셨을까요,

다 내가 무능해서 발생한 일입니다,

평생 학자로나 살아갈 것을 뒤늦게 정치판에 뛰어 들어서는 많은 분들에게 이런 면목 없는 일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민 대통령이 연방대통령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삼일특공대의 보고서에서 제시되었던 해법을 토대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참에 연방정부의 존재이유를 확실하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대고려땅 어디에서도 대고려연방보다도 상위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집회허가를 내어준 연방행정법원의 판사가 들여다본 그 법조문조차도 대고려연방의 연속적인 안녕보다도 상위의 개념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다시 고쳐 쓰면 되는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결코 유약하지 않은 연방대통령님의 역동적인 지도력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대고려연방의 미래는 태양처럼 밝다는 메시지를 팔천만 연방 국민들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정 위원장의 판단이 옳았음을 북쪽의 인민들에게 재차 삼차 확인시켜 주셔야 합니다!”  


연방대통령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민 대통령의 격정적인 질책을  듣고 있었고 손수건을 쥔 그의 오른손이 힘껏 쥐어졌다.   

“민 대통령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난 본시 평생을 민족사학자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방금 하신 그 말씀은 저 같은 옹졸한 학자가 감당하기에는 분명 벅찬 일이긴 합니다만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내 평생 정치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후일의 역사가들이 대고려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겁쟁이였다고 기록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함께 정 위원장을 만나러 갑시다!

가서 우리 세 사람이 손이라도 맞잡아서 팔천만 국민들의 걱정거리를 해소시켜 줍시다!”


이 시각 정 위원장의 관사 경호동에 마련된 연방총무처 사무실은 갑자기 부산해졌다.

연방대통령 비서실로부터 모종의 연락을 받았던 것인데 진숙이 다급하게 정 위원장의 서재로 달려갔다.

“지금 연방대통령님과 민 대통령님께서 위원장님을 뵙기 위하여 헬기 편으로 출발하셨다고 하십니다!”

일어선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바깥 정원만을 바라보던 정 위원장이 표정하나 없이 하는 말이다.

“뭣 하러 번잡스러운 행차를…”


헬기가 관사 앞에 내렸을 때 정 위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췌한 얼굴을 한 부인이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두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서있었다.

헬기가 내려앉은 바로 이 자리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 위원장에게 탄원하려는 수천 명의 민원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자리다.

정 위원장의 관사를 경호하던 연방경찰의 거듭된 경고에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진숙의 요청으로 부인이 직접 이들을 설득하면서 문제가 풀렸다.

부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민원인들이 오십 보 가량 뒤로 물러나 헬기의 착륙자리도 확보해 주었고 소란스러운 고함소리 대신 피켓시위로 전환하여 정 위원장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연방대통령이 한눈에도 병세가 완연한 부인에게 다가가 정중한 자세로 목례한 후 인사말을 건넸다.

“여사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이 다 저의 부덕으로 빚어진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용서해 주십시오!”

민 대통령도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었지만 부인의 굳어진 표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진숙은 두 대통령을 서재로 안내하면서 관사를 압도하던 무거운 기운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서재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정 위원장이 문밖에서 두 대통령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문 밖까지 나가서 영접했어야 했는데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 위원장의 표정 없는 인사말에 민 대통령이 먼저 반응했다.

“위원장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렇게까지 말씀을 안 하셔도 됩니다,

여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셨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세 사람은 서재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원탁의 응접 소파에 둘러앉았다.

두 대통령은 이 집을 강하게 짓누르던 침울한 기운을 느끼면서 한동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다과상이 들어왔다.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은 부인이 병세가 완연한 위태로운 자세로 직접 녹차를 따랐다.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닙니다만 결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 위원장님의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도 크십니다,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안치되어 계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부인이 눈물을 보였을 때 당황한 연방대통령이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그 문제를 상의드리러 왔습니다,

여사님의 걱정을 방치하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때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중심을 잡고 있던 부인의 부럽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세 분이서 잘 결정하시겠습니다만 아무리 통일된 세상이라고 해도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 정서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고것들을 하루아침에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부인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묵묵히 듣고 있던 정 위원장이 찻잔을 퉁명스럽게 내려놓았다.

정 위원장의 불편한 감정상태를 알아차린 부인이 진숙을 바라보며 무언의 표정으로 말했다.

진숙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부인이 물러가자 연방대통령이 정 위원장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의 집회가 연방행정법원이 인용한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연방법에 따라서 엄중하게 조치할 생각입니다!

위원장님의 선대 어른들께서 모셔져 있는 주석궁이 모욕당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정 위원장이 연방대통령의 말을 끊고 나섰다.  

“나나 우리 인민들에게 있어 주석궁은 말입니다,

두 분 대통령님들께서 생각하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감히 떼를 지어서 고래고래 고함이나 지르는 그런 경박스러운 장소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라의 통일조차 인정하지 않는 저런 허접한 자들에게 우리 연방은 합법적으로 집회 허가까지 내줬단 말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모욕당했습니다,

그 작자들이 누굽니까! 토착왜구와 토착 땟놈들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우리 연방을 또다시 두 동강 내겠다고 설쳐대는 역도들이란 말입니다!

앞전 헌법재판소 사건 때도 그렀더니만 우리 연방은 어째서 매사에 끌려만 다니는지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때를 봐가면서 찾아야지 역도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법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아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정 위원장의 감정 상태는 격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대통령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정 위원장의 격한 감정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정 위원장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입술 주변을 거칠게 닦은 후 하던 말을 계속했다.

“조국의 통일!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내가 이룬 것들은 물론이고 선대 어른들께서 물려주신 것들까지 모두 다 내려놓았어요!

그런데 오늘날의 나의 처지는 삼천만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 안사람한테조차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내가 우리 인민들에게 나누어준 집단농장과 국유기업의 지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살림집들까지 고것들을 빼앗지를 못해서 온 사방에서 흔들어대고 있어요,

그 난리 통에 모든 것이 난장판이 돼버렸단 말입니다!

들어오시면서 보셨겠습니다만, 지금도 내 집 앞에는 내게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는 인민들이 저렇게도 많습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에서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하다 하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영전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가 되고 말았으니…”


정 위원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두 대통령을 극도로 민망하게 만들었다.

민망한 그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지 각기 딴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돌아가는 나라꼴을 보자면 겉으로만 동등한 통일이네 하면서 우리 체면을 살려준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경제력에서 월등한 남조선한테 흡수당했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하긴 우리끼리니까 톡 까놓고 얘기해서 틀린 말도 아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력에서는 흡수당한 것이 맞지요 우리가!”


그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민 대통령이 이 대목에서 펄쩍 뛰듯이 이의를 제기했다.

“단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고려연방이 핵무기보유국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부터 우수한 기술 인력과 천연자원까지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북쪽은 통일의 당당한 주역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는 남과 북의 대등하면서도 공정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통일이 분명합니다!”


이때 정 위원장이 손사래를 치면서 민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마치 문제의 본질을 흩트리지 말라는 표현 같았다.

내가 원했던 통일조국은 이런 무례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한번 보세요? 나라의 기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온갖 종류의 역도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는데도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손발을 놓고 있는 연방의 현실을 똑똑히 직시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런 허약한 나라는 나나 나를 따르던 삼천만 우리 인민들이 원했던 통일조국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이제는 민 대통령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위원장님께서 제기하신 작금의 문제들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조속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들입니다,

부동산문제를 우리가 힘을 모아서 잘 해결해 내었듯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유기업들의 회생문제도 우리가 중지를 모은다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 꼭 해결해야만 합니다!

헌법재판소 문제만 하더라도 우려곡절은 있었지만 위원장님의 지적대로 현재는 폐지절차를 밟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는 마땅히 보장되어야겠지만 통일연방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반사회적인 집회시위조차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위원장님의 말씀대로 나라의 기강을 분명하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방대통령님께서 따로 생각하신 것도 계시고 하니까 이번에도 잘 정리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위원장님의 섭섭한 마음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공감합니다만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씩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위원장님의 용단으로 일으켜 세우신 대고려연방입니다!

다소간 힘이 드시더라도 우리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 위원장님께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어주십시오!”


연방대통령과 민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두 대통령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창밖의 정원으로 얼굴을 돌리며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요사이는 내가 참으로 생각이 많습니다만 통일된 우리 연방과 나와의 갈등구조는 앞으로도 멈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방금 이 말은 정 위원장이 통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순간 두 대통령은 심장이 멎는 듯 흠칫했다.

“민주주의는 대고려연방의 대세가 분명한데도 통일이 된 지 5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난 아직도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통일조국을 위한 길인지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이쯤 되자 연방대통령의 두 눈이 지그시 감기면서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민 대통령도 긴 한숨을 내어 쉬면서 우두커니 천장만 바라봤다.

이럴 때 정 위원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제에 울려 퍼졌다.

“더 이상은 역도들에 의해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수모를 당하시는 꼴을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곧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정 위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2월의 차디찬 찬 공기에 잔뜩 위축된 창 너머의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로한 연방대통령이 떠나기에 앞서 정 위원장을 한번 안아보려고 했지만 정 위원장은 굳이 사양한 채 악수로 대신했다.

민 대통령과도 표정 없는 간단한 악수로만 인사했을 뿐 잘 가라는 인사말조차 없었다.

두 대통령이 헬기에 오르고 있었을 때 이번에도 정 위원장은 보이지 않았고 정 위원장의 부인과 부인을 부축하던 진숙만이 배웅했다.


두 대통령이 정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간 며칠 후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검정색정장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금수산태양궁전에 나타났다.

정 위원장이 그의 직계가족들과 소수의 측근들만 대동한 채 전격적으로 주석궁을 방문한 것이다.

나란히 선 백색의 두 대형 동상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들은 복잡한 심경으로 참배에 나섰다.


정 위원장의 바로 뒤에서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서있던 부인이 최대한 자제하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부인의 이 소리가 그렇잖아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진숙은 극도로 허약해진 부인이 혹여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부축했다.

진숙에게 기댄 채 위태롭게 걸음을 떼던 부인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지금 부인은 정 씨가 며느리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육신의 한계를 이겨내는 중이다.


짧은 동상참배를 마친 일행들은 앞장선 정 위원장을 따라서 더욱더 숙연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실제로 북한의 제1,2대 통치자들이 잠들어 있던 금수산태양궁전의 가장 중심부 영생홀이다.

부인을 부축하면서 정 위원장과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영생홀로 걸어던 진숙은 미세하게 조종된 공기의 온도차를 느낄 수 있었다.

낮게 깔린 조명의 시각적 효과까지 가중되면서 스산함을 느낄 정도의 찬 온도가 몸 전체를 파고들었다.


서너 발짝 정도 앞장선 정 위원장이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대형 유리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뒤를 진숙의 오른팔에 의지한 채 겨우 걷고 있던 부인과 자녀들 여동생 정숙이 뒤따랐고 또 그 뒤를 네 명의 국정자문위원들과 곽 사령관이 따르고 있었다.

정 위원장이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가 유리 관속에 모셔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던 순간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복받치듯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달후면 할아버지의 사십 주기다. 할아버지가 세운 이 나라에서 사십 주기를 할 수 없게 된 이 참담한 상황이 서글펐을 것이다.


정 위원장의 통곡 소리는 그렇잖아도 서러운 감정들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의 감정보따리를 한꺼번에 터트리게 하는 마중물이 되고 말았다.

영생홀의 장내는 가슴까지 들썩이면서 격하게 통곡하는 소리로 긴 울림이 만들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진숙은 부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앉게끔 유도했다.

부인의 탈진을 염려하여 더 이상의 체력방전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진숙의 고육지책이었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감싼 유리관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그렇게 통곡하던 정 위원장이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누워있던 유리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누구보다도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아버지였기에 할아버지와 비길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유리 관속에서 굳이 환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아버지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정 위원장은 말 똥 같은 눈물을 끝도 없이 흘렸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고 회한의 표정이 아닌 밝은 모습으로 울고 있었다.


오래전, 장군님이라 불리던 정 위원장의 아버지는 영생홀에 잠들어있던 그의 아버지를 참배한 후 함께 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향후 자신은 죽어서 유리 관속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지만 공화국의 단합과 안정을 위하여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 장군님의 소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시고 자연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쉬십시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죄송합니다"


눈물로 범벅된 정 위원장이 무릎 꿇은 자세로 울음을 터트리자 뒤에 서있던 일행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통곡소리를 이어나갔다.

지금 정 위원장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비장함과 소회의 감정이었다.

3대에 걸친 정 씨 왕조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림에 따라 더 이상은 이곳에 모실 수 없게 되었다는 죄송함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편히 자연으로 보내어 드린다는 감정이 복합된 눈물이었다.


오랜 세월 답답한 유리 관속에 누워있어야 했던 것이 어찌 망자들의 뜻이었겠는가!

자신이 세우고 대를 이어온 왕국이 자식과 손자대에서도 유지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죽어서도 도움을 주고자 했던 고통의 감내였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조명등 아래에서 온전하게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죽음은 보통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고단했던 유리관 속에서의 잠자리를 청산하고 편히 쉴 수 있는 대자연의 안식처로 돌아가게 되었다.  


진숙의 어깨에 의지한 자세로 힘겹게 걸음을 떼던 부인이 시할아버지의 유리관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했다.

부인의 뒤를 이어 한 명 한 명 유리관을 어루만지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부인이 시아버지가 누워있던 유리관으로 이동하는 사이 두 차례나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음을 멈추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마다 뒤를 따르던 시누이 정숙이 재빨리 다가와 진숙과 함께 부인을 부축해 주었 기운을 회복할 때까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기다려주었다.

부인이 시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허리 깊숙이 절을 올릴 때에도 정숙이 진숙의 맞은편에서 부인의 오른팔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의 부축으로 시아버지를 향한 며느리로서의 예를 다할 수 있었던 부인이 또다시 나지막한 소리로 흐느끼자 정숙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함께 따라서 흐느꼈다.


진숙도 밝은 표정으로 누워있는 유리 관속의 장군님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지금 진숙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 두 영혼의 안도하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은 산자들을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장군님이라고 불렸던 북한의 제2대 통치자는 자식대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기꺼이 방부제를 뒤집어쓰고 유리 관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 시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정 위원장과 정숙의 표정을 통해서 이제야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자식들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산자들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저만치서 대기하던 자들이 다가와 그들의 소임을 시작하려고 했다.

모두 네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가장 먼저 취한 행위는 정중한 자세로 죽은 자에게 묵념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죽은 자의 신분 따위와는 무관하게 누구라도 공평하게 예우하는 일종의 관습으로 보였다.


정 씨 왕국을 창업했던 제1대 통치자의 유리관 뚜껑부터 조심스럽게 치워졌다.

오랜 세월 참으로 답답했을 유리관을 벗어난 죽음이 자연의 향기가 배어 있는 나무 관으로 옮겨졌다.

그 순간 강력한 방부제에 의지한 채 억지로 유지되던 피부의 탄력은 자연의 산소를 만나게 되자 이내 자연의 모습으로 변색되었다.

이제야 마네킹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고 자연의 일부가 될 준비를 서두르는 듯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의 작업속도는 대단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변색된 시신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어느새 제2대 통치자의 시신도 나무 관으로 옮겨졌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목관을 둘러싼 붉은 천에는 목란과 무궁화가 사이좋게 수놓아져 있어 한반도의 절반이 아닌 통합된 대고려의 대지에서 영면에 들것임을 예고했다.


상윤과 규태가 혹시라도 정 위원장이 다른 생각을 은 것은 아닌지 진숙을 다그쳤을 때도 진숙은 일관되게 정 위원장의 마음은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진숙이 곁에서 지켜본 정 위원장의 고민은 통일을 후회하는 그런 류의 고민이 아니었다.

통일 이후로도 화학적인 결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연방내부 문제의 극복을 위한 대승적인 고민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진숙의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두 대통령이 관사를 다녀간 후 정 위원장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진숙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진숙의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안도의 마음으로 급변한 것은 바로 이 문양을 보고 난 직후였다.

대고려연방의 국화가 새겨진 무명천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목관을 감싸자 진숙의 모든 두려움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두 개의 목관을 실은 차량은 극비리에 오봉산 봉사사업소에 도착했다.

화장장의 몇몇 필수인력들만이 입구에서부터 정 위원장 일행을 맞이했고 번잡한 절차들은 일체 생략되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목관을 실은 이동용 기구 두 대가 충분히 달구어진 시신 소각장을 향해서 천천히 이동했다.

관속에 누워있던 두 죽음은 그들이 남긴 명성에 비해서는 말도 안 되게 소박한 절차 속에서 칠백 도를 상회하는 뜨거운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죽었지만 산자의 모습으로 참으로 고단한 시간을 보냈던 죽음이었다.

이제라도 이승에 남겨두었던 마지막 흔적을 대자연으로 되돌려주려는 엄숙한 의식이 시작됐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거추장스러운 육신은 모두 태워졌고 미세한 가루만이 항아리 속에 남겨졌다.


정 위원장과 정숙이 각자 자신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뼛가루가 담긴 항아리를 하나씩 받아 들고 차에 올랐다.

동이 트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각, 

이 비밀스러운 행사에 참석했던 이들은 몇 대의 차량에 분산되어 달려가고 있다.

그곳은 바로 그들의 정신적 고향 백두산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먼지 펄펄 날리는 갑무경비도로를 따라서 거침없이 달려온 차량의 행렬은 장군봉아래 주차장에 당도하고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차량에서 내린 일행들은 대고려연방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이번에는 정 위원장의 자녀들이 각자 자신들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고이 모셔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청명한 하늘 사이로 새하얀 구름들이 춤을 추며 지나가는 듯했다.


장군봉에 오른 정 위원장이 그의 큰 딸이 전해주는 항아리를 받아 들고 백두산을 향해서 소리쳤다.

“수령님! 이제 백두산의 정기가 되셔서 이 나라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대고려연방으로 하나 된 이 나라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목청을 드높여서 외치던 정 위원장이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항아리의 방향을 과감하게 아래로 바꾸었다.

그러자 때마침 장군봉에 휘몰아치던 바람에 실려서 백두산의 온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 아래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날아가는 유골들을 향해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제1대 통치자와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정 위원장의 얼굴에는 또다시 뜨거운 눈물흘러내렸지만 이번에는 미안함이나 슬픔이 아닌 온통 감격의 눈물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백두산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비워진 항아리에는 정 위원장이 손수 장군봉의 흙을 쓸어 담았다.

장군봉의 흙으로 가득 채워진 항아리를 직접 들고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고이 안고서 정 위원장의 곁을 지키던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내려왔다.


일행들은 향도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다소 기운을 회복한 부인이 진숙의 부축을 받으면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자신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진숙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면서 고마움을 표시하자 진숙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던 십여분의 짧은 시간 동안 진숙은 이제야 정 위원장의 결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 위원장은 지금 뼈를 깎는 심정으로 대고려연방의 안정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북쪽 다섯 개 주 전역걸쳐 강력하게 남아있던 정 위원장 집안의 그림자를 하나씩 걷어내는 작업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정 위원장이 천지를 향해서 걸어 내려갔다.

천지의 물가에 다다르자 또 다른 유골함을 그의 아들로부터 건네받았다.

항아리를 가슴에 고이 안은 채 멍하니 드넓은 천지를 바라보던 정 위원장이 갑자기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이 모습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릎까지 물속으로 들어간 정 위원장의 발걸음이 멈추었던 것인데 들고 있던 항아리를 높이 들더니 장군봉에서처럼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장군님을 진작 여기로 모셔왔어야 했었는데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갑갑하셨습니까? 이제 장군님이 태어나신 이곳 백두산에서 편히 쉬십시오,

장군님만큼은 저의 결심을 격려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또다시 항아리의 방향을 아래로 향했다.

천지에서 불어 치던 세찬 겨울바람이 이번에도 항아리 속의 유골들을 더 넓은 천지날려 보냈다. 

일행들은 장군봉에서와 같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제2대 통치자와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비어진  항아리에 천지의 물을 담으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어디서 살아가든 아버지의 뼛가루가 녹아든 천지 물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면서 살아가렵니다”

정 위원장이 항아리를 들고 물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신기하게도 바람이 멈추었고 천지를 희미하게 가리안개구름들이 저 멀리 사라져 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 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격려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모처럼만에 정 위원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예전처럼 여유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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