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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Oct 02. 2024

잊혀진 독재자의 도발

28회

윤 소장은 출근에 앞서 민 대통령의 서울 성북동 자택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민 대통령은 윤 소장이 건네는 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정독하면서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표라던가 타원형을 그리기도 하면서 공감의 뜻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장을 넘겼다.

마침 다음 달  국정자문위원회예정되어 있어요,

정 위원장을 만나게 되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를 해봐야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연방의 지속적 안정을 위해서는 조선노동당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남쪽의 진보정당과 통합하게 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가 있어요,

대단히 훌륭한 생각이에요”

“그런데 대통령님! 불길한 소식도 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남쪽에서도 신일진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일진회를 이끌고 있는 나 회장이란 자가 돈을 물 쓰듯 하면서 전국의 여러 극우세력들을 규합하고 다닌다 합니다,

최근에는 전국의 각 지부들마다 떠들썩하게 모임들을 가지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범상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전쟁 때 피난 나온 이산가족들의 2세 3세들을 불러 모아놓고 무슨 조상 땅 찾기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선동을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자들의 모양새로 볼 때 조만간 큰 사고를 한번 칠 것 같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몰려온다는 듯 민 대통령이 안경을 벗으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윤 소장을 바라봤다.

“그 소식은 나도 듣고 있었어요,

친일세력들이 세력을 모으고 있다면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 같고요,

독도문제가 불가역적으로 종식되고 나니까 그 패배의식을 이런 식으로 되갚고 싶었겠지요,    

그럼 이제 우리 연방을 분열시키기 위한 저들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인가요?

그동안 윤 소장 팀에서 우려했던 일들이 북에서도 남에서도 현실화되기 시작했군요!

그런데 조상 땅 찾기 운동이라면?”


내용자체가 다소 뜬금이 없다는 듯 민 대통령이 윤 소장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아마도 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실시했던 토지의 무상 몰수조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몰수 이전의 상태로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회복시키겠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의 실현가능성과는 별개로 이러한 시도자체가 북쪽의 다섯 개 주에 몰고 올 파급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막강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 문제는 결코 간단히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대단히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민 대통령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고 또다시 안경을 벗었다가 눈을 깜박이면서 다시 썼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잇던 소장의 얼굴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어쩌면 대고려연방 전체를 큰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같은 문제로 독일사회도 통일 초창기 큰 홍역을 겪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정 위원장님이 받게 될 상실감이 문제입니다, 감당하시기가 …”


이때 민 대통령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

“그렇지가 않아요! 내가 아는 정 위원장은 대고려연방을 이간질하려는 작자들의 간계에 휘둘릴 만큼 품이 작으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 윤 소장이 너무 과한 걱정을 하는 거예요,

암요! 정 위원장께서 능히 잘 풀어 나가실 거예요”

정작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민 대통령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연방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세력들이 노리는 것도 자명했다.

정 위원장을 비롯한 북쪽사회의 상실감을 부추겨서 통일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단코 저들의 계략에 휘말게 할 수는 없었다.      


제법 완연한 가을 냄새가 느껴지는 시월초의 오전 시각,

민 대통령이 벼르고 있었던 국정자문위원회 정기회의가 새로 입주한 연방정부청사 내 국정자문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국정자문위 수석 부위원장인 민 대통령이 오늘은 작심을 했다는 듯 시종일관 회의를 주도했다.

“통일독일 사회의 전례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안건이 있습니다,

1946년 북쪽지역에서 실시되었던 토지 무상 몰수조치의 효력에 대한 법제화를 시급하게 서둘러야 합니다!

과거 독일이 이 같은 문제로 큰 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는데 우리도 1946년의 조치를 무효로 하는 토지반환소송이 제기될 경우 독일 못지않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이미 일주일 전, 정 위원장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던 터라 대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던지 정 위원장의 표정에선 여지없이 불편한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민 대통령은 이참에 이 골칫덩이를 완전히 뿌리 뽑을 태세로 밀어붙였다.

“첫째는 1946년의 토지 무상 몰수조치에 따른 법적 효력을 인정하고 일체의 토지건물반환소송이라던가 피해보상에 따른 소송은 연방정부를 상대로만 제기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아야 합니다!

둘째는 연방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결과는 현재의 부동산 소유권자에게는 일체 미치지 않는다고 이 역시 대못을 박아야 합니다!

오늘 제가 이 같은 안건을 제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독도를 침범했던 다케시마 수복결사대라는 일본의 극우단체가 신일진회라는 우리나라의 괴 단체를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신일진회라는 반연방 매국단체에서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사회문제화 시킬 태세라고 합니다.

깊이 헤아려보지 않더라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단박에 알 수가 있습니다,

대고려연방을 또다시 남과 북으로 분열시키겠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일본뿐만이 아닙니다!

중국도 이미 이와 유사한 활동을 개시했다는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일본과 중국의 노림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보다도 한 발 앞서서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두 번 다시는 이따위의 허접한 반통일 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경고를 보내야 합니다!”


민 대통령의 격정적인 연설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당사자격이라 할 수 있는 정 위원장이었다.

국정자문위원장인 정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느긋한 자세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른 위원들도 다 같이 기립하여 박수에 동참했다.


이 안건은 지체 없이 연방정부에 통보되었고 연방정부는 신속한 입법절차를 위하여 의원발의 형식으로 입법절차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부동산 문제로서 부동산과 관계된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신일진회를 중심으로 남쪽의 여러 극우단체가 참여한 ‘조상 땅 찾기 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광화문광장에서는 연일 대규모의 반연방집회가 열렸다.

그들의 목적은 이 민감한 부동산문제를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부각해서 다시금 연방을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단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대고려에는 연방의 통일을 실질적으로 기획해 낸 삼일특공대라는 걸출한 브레인집단이 있었다.

이들의 한 발 앞선 진단과 처방전은 곧바로 국정자문위원회에 보고되었고 정 위원장과 민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엄청난 무게감으로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에 넘겨졌다.

연방의 이러한 작동방식은 갓 통일을 달성해 낸 신생의 통일나라로서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운영 시스템이었다.

전광석화처럼 신속하게 연방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반통일 분열세력이 의도했던 전면적인 부동산 소송 전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원천 봉쇄되고 말았다.


그러자 친일 분열세력들이 선택한 방법은 연방 헌법재판소에 법률의 위헌성을 가려달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으로 싸움의 방식을 변경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일진회와 손이 닿아있던 몇몇 종편방송에서는 연일 수준 낮은 토론자들을 등장시켜서 제정된 연방 법률이 곧 위헌판결이 날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다.

오랜 세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남쪽의 여섯 개 주에서는 부동산문제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핫한 사회이슈도 없었다.

비록 그것이 87년 전의 오래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멀쩡한 사유지를 일방적으로 몰수당한 후손들의 억울한 사정들이 타당한 논리가 되어서 사회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나마 국정자문위원회가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법제화로 대비를 하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연방이 또다시 절단날 수도 있는 대단히 위중한 상황으로 변해갔다.

사유재산권의 문제는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북쪽으로서는 연방정부차원법률적인 보호막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민 대통령은 마당의 여기저기를 거닐면서 연방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여러 시련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팔십 년 이상을 다른 체제로 살아왔는데 살림을 합쳤다고 해서 어찌 하루아침에 생각까지 같아질 수 있겠는가?

하나의 생각으로 녹아들려면 오래된 상감청자처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어서 어느 일방의 집단적 상실감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집단의 상실감이 커지면 극단적으로 대응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법!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연방의 현실을 감안할 때 반드시 치밀한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 위원장 스스로 상실감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이제 막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민 대통령의 성북동 자택으로 정 위원장이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일전에 대통령님께서 전해주신 보고서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는데 제 마음에도 쏙 들었습니다,

보고서를 보고 있자면 우리 연방의 미래는 대단히 희망적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특정 정당의 독주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다른 세 개의 정당이 함께 공존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연방도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조선의 역동적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요사이는 제가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윤 소장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요”

“아 예 꼭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님, 허구한 날 광화문광장에서 떠들어대는 저 시끄러운 소리는 대체 언제쯤 잦아들 것 같습니까?

연방법까지 만들어진 마당에 소득도 없는 저따위의 노릇을 지속하는 자들의 속내야 뻔하겠습니다만 난 당체 헌법재판소라는 것이…”


은연중 정 위원장이 헌법재판소에 대한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민 대통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엔 아마도 헌법재판소에서 심판청구를 기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위원장님께는 여러모로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애초 우리가 통일헌법을 제정할 때 좀 더 꼼꼼하게 챙겨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단 말입니다,

인민들의 총의로 선출된 연방의회라는 기구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무엇 때문에 별도의 옥상옥 기관을 또 만들어서는 이 사단을 초래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아홉 명의 판사들이 모여서 연방법이 옳으니 틀리니 하는 심판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정 위원장의 입에서 불만 섞인 발언까지 튀어나오자 민 대통령은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장님!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아마도 걱정하시는 일없이 모든 것이 잘 처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절차가 그렇다 보니 번잡스럽게 되었을 뿐인데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은 민 대통령이 새벽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쳐보았다.

어김없이 오늘자 신문지면도 온통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제로 도배되어 있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신일진회의 농간질에 온 나라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이 무렵에 맞추어서 대형사고까지 터지고 말았다.


평일의 낮 시간이라 인적이 한산하던 개성시내의 어느 단독주택 단지에 낯선 차량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서울 말씨를 사용하는 수십 명의 청장년 남녀들이 우르르 차량에서 내려 삼사 명씩 조를 짜고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들의 손에는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명의로 된 땅문서와 내용증명서가 쥐어져 있었다.

내용증명서에는 자신들을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에 의해서 불법적으로 집터를 몰수당한 진정한 토지소유자의 상속인들로 소개하면,

이제 토지의 소유권을 회복하러 왔으니 한 달 내로 집을 비워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생판 처음 보는 남의 집 대문에 발길질을 해대며 우체함에 자신들이 가지고 온 서류들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작성한 내용증명서를 오전에 우체국에 접수시키자 말자 그 사본을 들고 달려와서는 이 같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말이야!

구십 년이 다되도록 주인허락도 없이 남의 땅에서 집을 짓고 살았으면 보상을 해주던지 집을 비워주던지 해야 될 것 아니야!”


갑자기 남쪽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뜬금없이 소란을 일으키자 영문을 모르던 거주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사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대부분 사업장에 출근한 시간이라 주택단지에는 연로한 거주자들뿐이다.

대략적으로 내용증명서를 읽어본 거주자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출근한 며느리 대신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나온 칠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함치듯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요?

이 집은 경애하시는 위원장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틀림없는 우리 집이란 말입네다,

우리 명의로 등기까지 다 마쳤는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이 보다는 낫겠수다, 적당이 들 하슈! 적당히!”  


근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뚱뚱한 중년여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쳤다.

유난히도 큰 귀걸이와 두툼한 금목걸이가 뽀얀 살결사이로 철렁이고 있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 여기 적힌 내용증명서나 똑바로 읽어보고 말하세요!”

“읽어보나 마나지! 뉴스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우리도 알만큼은 다 안단 말입니다!

연방법에서도 개인에게는 소송 전을 못하게 돼 있는데 그러니 이거이다 되지도 않을 미친 개소리지 않아요?

따슨밥들 자시고 그렇게도 할 일들이 없으십니까?

작작  하시고 이제 그만들 남쪽으로 돌아가시라요!”

그러면서 보란 듯이 우편함에 꽂아둔 내용증명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자 뚱뚱한 중년여자가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 할망구가 뚫린 입이라고 다 같은 입인 줄 아나?

뭐 미친개소리! 그동안 주인허락도 없이 남의 땅에서 집 짓고 이만큼이라도 잘 살았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뭐! 미친개소리가 어쩌고 어째! 아 그래 알았어요 알았어!

시끄럽게들 떠들 것 없고 할망구가 좋아하는 그 연방법대로 한번 해보자고요!

여기 내용증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한 달의 말미를 줄 테니까 그때까지 집을 비워주던가 아니면 땅세를 내던가?

양단간에 선택을 하란 말이요!

안 그랬다간 헌법재판소 판결이 내려지는 대로 집이고 뭐고 불도저로 확 밀어버릴 테니까!”


그 사이 급히 연락을 받고 직장에서 달려온 거주자들이 모여들었다.

큰 키에 비쩍 마른 중년사내가 남쪽 사람들을 향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이 주택단지의 인민반장이요!

보아하니 여러분들이 옛날 이 집터 지주의 자손들인 것 같소만 알 만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뭐 하는 횡패질이요!

따질 것이 있으면 연방정부에 가서나 따질 것이지 북조선사람들이 좀 가난하게 산다 싶으니까 만만하다 이것이요?

몽둥이로 혼쭐들을 내기 전에 퍼떡 물러나기요!”


인민반장의 말에 건너편에 서있던 운동 꽤나 한 듯 한 거구의 청년이 호기롭게도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인민반장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영감탱이는 우리가 젊잖게 말로 해서는 도무지 못 알아 처먹는 인간이구만!

우리 땅에서 나가달라는데 뭔 말들이 그렇게도 많아?

우리 땅에서 그만큼 잘 먹고 잘살았으면 이제는 좀 꺼지란 말이야!”

이 말과 동시에 잡았던 멱살을 세차게 밀쳐버리니 연로한 인민반장이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거주자들은 한결같이 눈들이 뒤집히고 말았다.

근처에 보이던 빗자루며 쓰레기통이며 심지어는 삽이던 낫이던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던 집어 들었다.

두 패로 나뉜 이 날의 집단난투극은 자치주의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할 때까지 살벌하게 전개되었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간 사람들이 양쪽에서 모두 열 명이 넘었다.


이날 발생했던 충격적인 사건은 삽시간에 북쪽 다섯 개 주로 전파되어 남쪽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통일이전부터 남한지역에서는 북한지역의 땅문서가 꾸준히 거래되고 있었는데 몇몇 사채업자가 매집한 땅문서만 해도 수십만 평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이 북쪽 다섯 개 주지역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갖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자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정 위원장의 관저 앞으로 몰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연일 관저 밖에서 외쳐대는 인민들의 들끓는 호소를 목도하면서 정 위원장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었다.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력을 아낌없이 내려놓았던 정 위원장이다.

이제 더 이상 인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 그 자신의 상실감으로 다가왔고 그것을 참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 시기 정 위원장이 가졌을법한 상실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공감의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민 대통령과 연방대통령이었다.

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앞둔 상황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아직 민주주의 시스템에 생소한 정 위원장으로서는 섭섭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대관절 그놈의 민주주의가 무엇이 간데 연방국회위에 군림하는 아홉 명의 지식분자들 손아귀에 우리 인민들의 생존 여탈권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절차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손을 놓고 있는 두 대통령에 대하여는 아직 내색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불신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문제이기에 앞서 북쪽 인민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정 위원장이 나서야만 되는 상황으로 내어 몰렸다.

정 위원장은 이 같은 사태를 마냥 방치하게 된다면 독일 통일 후 동독인들이 겪었던 2등 국민으로서의 차별적 대우가 고착화될 수 있다고 봤다.

오직 자신을 믿고서 민족통일의 대장정에 순순히 따라준 인민들에게 이 같은 차별을 감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북쪽 인민들의 하소연은 어차피 그 자신의 몫일터 정 위원장은 평소 그 자신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기로 결심한 후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민 대통령이나 연방대통령에게는 단 한마디의 통보도 없이 네 명의 북쪽출신 국정자문위원들을 대동하고 광개토대왕 시를 찾았다.

정 위원장 일행이 갑자기 들이닥친 곳은 연방정부청사 인근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건물이었다.

정 위원장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헌법재판소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연방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연방대통령으로부터 다급하게 연락받은 민 대통령도 지금 만사를 제쳐놓고 광개토대왕 시를 향해서 달려가는 중이다.


헌법재판소의 1층 현관 앞에는 정복 입은 경비들에 의해서 출입자들이 일일이 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번잡스러운 출입절차 따위를 깡그리 무시한 앞장선 네 명의 국정자문위원들이 눈에 쌍심지를 켠 채 거칠게 밀고 나아갔다.

어렴풋이나마 상대를 짐작한 직원들은 크게 당황하면서 허둥대기 바빴고 속수무책으로 저지선이 뚫리고 말았다.

때마침 오늘 헌법재판소에는 다른 중요사건으로 전원재판부가 열릴 예정이어서 아홉 명의 판사들이 모두 재판관 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위원장 일행이 탄 엘리베이터가 3층에 당도했지만 십여 발자국 거리에 있던 소장실 앞은 인적도 없이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행들이 소장실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소장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밖으로 나와서 정 위원장을 영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정 위원장의 얼굴표정에선 그 자신의 상실감이 적나라케 드러났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번 빙긋이 웃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주위를 물리친 정 위원장이 직접 구둣발로 힘껏 문을 걷어찼는데 얼마나 세차게 찼던지 문 열리는 소리가 ‘쾅!’하고 우렁차게 들렸다.

여지없이 소장실의 목문이 활짝 열어젖히자 그 안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몇몇의 판사들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정 위원장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은 사무처의 긴급 보고를 통해서 이미 알고는 있었다.

지만 헌법재판소의 소장 체면에 뛰어 내려가서 맞이하기도 그렇고 해서 어정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정 위원장이 직접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어찌 되었던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그 상황은 대단히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으니 인사는 해야 했다.

오랜 법관생활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헌법재판소장은 다분히 뻣뻣한 태도로 정 위원장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하신다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주시니 저희들로선 대단히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용무가 있으실 것 같으니 앉아서 말씀하시죠!”


이때 정찰총국장 출신으로 곽 사령관과 함께 정 위원장의 분신으로 통하는 림광철이 삿대질까지 하면서 큰 소리로 호통 쳤다.

“뭐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당황스럽다고!

그래서 국정자문위원장님께서 친히 방문하셨는데도 소장이라는 작자가 나와 보지도 않았어!

뭐야 당신! 당신이 뭔데 우리나라 연방 지분의 절반이나 보유하고 계시는 우리 위원장님을 홀대하는 거야!”

림광철이 이 정도로 까지 소장실을 거칠게 뒤집어놓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봤다.


화가 덜 풀린 림광철이 소장과 판사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오늘 당신들이 이 나라의 국정자문위원장님께 행한 크나큰 무례에 대하여 지금 당장 정중하게 사과하시오! 어서!”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흥분한 림광철이 오른손을 들어 뺨이라도 때릴 것 같은 동작으로 판사들을 압박했다.

그제서분위기에 압도된 판사들이 잠시 움츠려드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끝내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고고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하여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뻣뻣한 자세 그대로 선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 그만들 하라우! 이만하면 충분히들 알아들었을 테니까,

이제 그만 들하고 당신들도 여기로 와서 자리에 앉지 그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정 위원장이 함께 온 네 명의 자문위원들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지시했다.

그러 자신들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서있던 몇몇의 판사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9인석의 둥근 탁자에는 정 위원장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이 둘러앉았는데 그들 모두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정 위원장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헌법재판소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여러 판사들한테 할 이야기가 있었어 걸음을 하였으니까 괜찮으시다면 나머지 재판관들도 모두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상기된 표정과는 달리 정 위원장의 어투는 어느새 공손하게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며 머뭇거리던 소장이 비서실장에게 그렇게 하라고 머리를 까딱였다.

“모두들 모이라고 연락했으니 곧 자리를 함께 하겠습니다만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 저희들에게 먼저 말씀을”

림광철이 또다시 눈알을 부랄이면서 소장의 말을 잘라먹었다.

“감히 이 작자가 누구한테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야!

위원장님께서 하명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만 한 치의 거짓부렁도 없이 답변하면 될 일을!”  


이 어색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와중에 연방대통령이 상기된 표정으로 불쑥 들어왔다.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왔으면 손에 든 손수건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들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하던 연방대통령은 정 위원장과 의례적인 악수만 나눈 채 정 위원장의 반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머지 재판관들이 모두 들어왔을 때는 앉을자리가 모자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소장이 연방대통령을 바라보며 보다 넓은 회의실로 옳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반대편에 앉아있던 정 위원장이 정색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번잡스럽게들 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얘기합시다!

정신이 어지러우니까 소장님도 그 빈자리에 대충 앉으시라요!”


정 위원장의 정색한 표정과 말투는 함께 있던 이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할 만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소장과 몇몇 재판관들이 군말 없이 빈자리에 앉자 나머지 재판관들은 바로 그 뒤에서 바짝 경직된 자세 그대서 있었다.

웬만큼 자리가 정돈되자 정 위원장이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이 자리에는 우리 연방의 최고 어른이신 연방대통령님께서도 계시고 하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갔습니다,

조국이 통일된 지 이제 겨우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지금 온 나라가 1946년도에 단행된 토지개혁 문제로 난리도 아니란 말입니다!

연방 법률도 제정되고 해서 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생각했는데 또 무슨 법률의 위헌성을 따진다고 하면서 여기 헌법재판소에 계류시켜 둔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 문제로 해서 지금 우리 인민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피로도는 하늘을 찌를 지경인데도 여기 헌법재판소에서는 대체 뭣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빨리빨리 판결을 내려서 인민들의 고통을 해결할 생각들은 하지 않고 차일피일 시간을 끄면서 뭉개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입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껌벅이던 연방대통령이 시선을 소장에게 고정시킨 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위원장님의 말씀이 온당하지 않습니까?

물론 헌법재판소의 입장도 있겠지만, 이렇게 지체될 일이 아님에도 이 문제를 대하는 여러분들의 자세가 안일한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소장님께서도 따로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던 한번 해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역정을 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던가!

비록 지금은 국정자문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 있기는 하지만 한때는 미국대통령과 맞짱을 뜨던 무시무시한 정 위원장이다.

또 한 사람은 명실 공히 대고려연방을 대표하는 연방대통령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강직한 재판관으로 살아온 헌법재판소장은 주눅 든 기색 하나 없이 일관되게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사건을 접수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을 뿐입니다,

저희들도 연방의 사정을 고려하여 가급적 서둘러서 심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들여다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아서 앞으로도 두 달가량은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과 위원장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할 말을 다하던 소장의 발언이 끝나자 정 위원장의 얼굴에서 또다시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좋소! 그렇다고 칩시다!

심리를 하는데 앞으로도 두 달이 더 소요된다면 그럼 뭐 연방법이 위헌을 했다는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보세오? 그렇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소장이 나머지 재판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범 답안을 말했다.

“지금으로선 어떻게 판결이 날지에 대해서는 어떤 예단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를 더 해봐야만”


정 위원장이 더는 들을 대답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연방대통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판관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쏘아붙이듯 말했다.

심중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 자신의 의중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 사건 더 이상 심리하지 마시오!

아니 내가 못하게 만들 테니까 그리들 아시오! 당신들은 이제 해산되었소!”

그리고 함께 일어선 연방대통령을 향해서도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방대통령님께 대고려연방의 국정자문위원장으로서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이 상황에서 연로한 연방대통령이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세는 그저 멋쩍은 표정을 지어면서 주섬주섬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여움을 푸시고 일단 저희들 간에 대화를 좀 더 나누어 보시지요?”

정 위원장이 목이 탔던지 탁자 위에 놓인 물 컵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말했다.

“두 번 말씀드리지 안 갔습니다!

연방헌법을 개정해서라도 헌법재판소를 해산시켜야겠습니다!

인민들의 총의로 선출된 연방의회가 공식적으로 제정한 법률이란 말입니다,

이런 법률을 두고서 위헌성을 따진다며 이러쿵저러쿵 말 많고 탈 많은 이 따위의 비효율적인 기구가 우리 연방에 존재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할 말을 다한 것 같으니 저희들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정 위원장은 오늘의 이 거사가 단순히 북측인민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정치이벤트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연방대통령을 대하는 태도가 매몰차게 차가웠다.

연방대통령과의 간단한 눈인사조차 외면한 채 정 위원장 일행이 소장실을 나가버린 바로 그때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연방대통령이 일순간 얼굴색깔이 흑색으로 변하면서 몸을 휘청였다. 

이때 소장실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달려와 혈압강하제긴급 복용하게 조치한 뒤에야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정 위원장과 동행한 네 명의 북쪽출신 국정자문위원들과 연방대통령까지 대고려연방을 움직이는 최고위의 권력층이 헌법재판소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외부에 알려졌다.

정 위원장 일행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는 먹잇감을 발견한 내외신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서 포위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서울을 출발했던 민 대통령의 차량이 이 시각 광개토대왕 시로 들어섰다.

옆자리에 동석한 윤 소장이 태블릿 PC 화면을 통해서 국내외 통신의 뉴스 속보를 빠른 속도로 정독했다.

이것을 민 대통령에게 보여주자 화면 속에 나타난 자극적인 헤드라인 문구만으로도 민 대통령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겨야 했다.

“연방대통령님을 뵈어야겠어요, 그 어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실지…”   


‘정 위원장! 헌법재판소 해산하지 않으면 다시 갈라서겠다고 선언!’
‘긴급속보! 대고려연방 또다시 분단위기!’
‘헌법재판소를 구둣발로 걷어찬 민주주의의 패륜아!’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잊혀진 독재자의 도발!’     

 

교토에 위치한 다케시마 수복결사대의 본부사무실은 온종일 걸려오는 우익 인사들의 격려전화에 열 개가 넘는 전화통이 불이 날 지경이다.

다카이 고문이 오랜만에 본부를 찾았고 아베 회장과 함께 차를 들고 있었다.

회장실의 벽면에 부착된 대형 TV화면에서는 NHK에서 반복적으로 내어 보내는 정 위원장의 헌법재판소 방문소식이 방영되고 있었다.

좀처럼 TV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다카이 고문이 모처럼만에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우리의 게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야, 진정한 승패를 가리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군,

역사적으로도 조센징은 단합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족속들이었어!

앞으로 본색을 드러내게 될 정 위원장의 행보가 크게 기대되는군!

통일을 위해서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영웅주의의 객기에 불과했던 것!

이제야 제정신을 찾았으니 다시 자신의 왕국을 회복하려고 들겠지! 그렇지 않은가 아베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쟁에 패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신의 왕국을 내려놓을 바보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암 그럴 테지! 머지않아서 반도국이 또다시 분단될 때를 노려서 그동안 우리가 미뤄두었던 다케시마의 눈물 작전을 마무리 지어야겠지,

아베군! 이 게임은 말이야,

처음부터 다케시마를 차지하는 나라가 이기는 게임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었어!”

“하이! 명심하겠습니다!

신 일본제철이 앞장서서 후원을 자처하고 있으니 여러 기업들로부터 충분한 정도의 후원금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신일진회가 추천하는 반도국의 친일정치인 지원 사업도 한층 강화하겠습니다!”

“아베군! 아낌없이 지원하여 주게나,

우리에게 협조하는 반도인들의 의식구조는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야 돼,

아직도 그들의 뇌리 속에는 우리가 주입시킨 반도인의 근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네”  

지금 이들은 4년 전 독도패전의 치욕을 되씹으며 그날의 패배를 되갚아 주기 위한 사무라이 전사로서의 결기가 드러났다.

다케시마의 눈물을 닦아줄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연방대통령의 관저를 방문한 두 손님이 조촐하게 마련된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와 주시니 무겁기만 하던 제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윤 소장도 한잔 받으시고!”


연방대통령이 손수 따르는 술잔을 받아 든 윤 소장이 왼쪽으로 자세를 돌려서 한 모금만 들이키고 내려놓았다.

“많이 힘드시죠 이사장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사장이라는 호칭에 연방대통령은 호방하게 웃으면서 윤 소장이 따르는 술잔을 받았다.

“그래 이 사람아! 팔자에도 없는 연방대통령이라는 직책이 날 무척이나 힘들게 하는구먼,

애당초 정치에는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를 한다니까”


받아 든 술잔을 단번에 들이켠 민 대통령이 대단히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지 않으셨겠습니까?

오늘 얼굴을 뵈니까 마음고생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방대통령님께는 여러모로 죄송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연방대통령이 민 대통령이 권하는 술잔을 이번에도 다 비운 후 그간 누구에게도 쉬이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정 위원장 그이가 참으로 염려가 됩니다,

오늘 헌법재판소에서 그이의 화난 목소리 뒤에 감추어진 근심 어린 눈매를 보았어요,

이 시점에서 정 위원장이 흔들린다면 정말로 큰일입니다!

통일을 위해서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북쪽의 인민들은 그이에게만 매달리고 있어요,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인민들의 호소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려 3대를 이어온 정 씨 가의 왕국이었어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고는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아직도 그 이의 말 한마디면 온 나라가 또다시 절단날수가 있어요,

그이에게는 아직도 그만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때 민 대통령이 윤 소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삼일특공대의 견해를 보고 드리라는 신호였다.

“사실 저희 팀에서는 정 위원장의 오늘 같은 파격적인 행보를 예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민주적인 사회 시스템이 생경한 북쪽으로서는 어쩌면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 위원장은 북쪽사회의 여기저기로부터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받게 될 것이고 그것을 외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볼 대목은 정 위원장의 스트레스가 가중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관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정 위원장이 제기하는 북쪽사회의 불만들을 방치하다간 어쩌면 미국 남북전쟁 직전기의 모습으로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소 무리스럽더라도 정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위기의 싹을 사전에 잘라내야 합니다!

방법은 다소 거칠었지만 오늘 정 위원장이 제시한 방식대로 조치함으로써 위기의 싹을 잘라야 할 것 같습니다”


연방대통령은 오늘의 참담한 상황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였기에 공감의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정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래서 뭉게구름이 먹구름으로 뭉쳐지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된다?

도처에 늘려있는 분열주의자들에게 결단코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연방대통령의 표정을 살피던 민 대통령이 살포시 연방대통령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으신 연방대통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연방의 팔천만 국민들을 한번 믿어보시죠!”

그제야 연방대통령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반쯤 남은 술잔을 마저 비웠다.

“그렇지요! 실은 나의 생각도 같은 생각입니다,

까짓것 그렇게 합시다! 내가 앞장서서 밀어붙일 테니 민 대통령님과 윤 소장도 많이 도와주세요!

암요! 우리 연방국민들이 나 같은 우매한 늙은이를 분에 넘치는 자리에까지 세운 것은 이런 일을 하라고 시킨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헌법재판소의 존폐문제로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을 때 일본과 중국의 언론들은 연일 호들갑을 떨면서 대고려연방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이것을 신호로 남과 북으로 나뉜 친일세력과 친중세력들도 연방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분열의 불쏘시개를 자임하고 나섰다.

이럴 때 국내의 여론은 점차 정 위원장과 연방대통령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과 중국 언론들의 악의적인 보도내용을 소개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반일 반중 여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연방대통령은 국정자문위원회의 결의사항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정 위원장이 제기했던 헌법재판소의 폐지 문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속 정당이 없었던 대부분의 연방의원들도 연방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내의 여론마저 연방헌법의 개정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연방의회는 신속하게 헌법개정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사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헌법재판소 아홉 명의 재판관들이 생소한 존재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선출하지 않은 생소한 자들에 의해서 자신들이 선출한 연방의회의 결정이 뒤집힐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굳이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필요하다면 국민들의 대의기관 위에 존재하는 옥상 옥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는 개선안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연방의회는 운영의 묘를 발휘했다.

법률의 헌법불합치 여부를 따지던 헌법재판소의 주요 기능을 연방의회의 법률제정 시스템을 보완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법제사법위원회 안에 ‘헌법일치판정위원회’라는 상설기구를 신설하는 방안이다.

이 상설 위원회에서 법률안의 헌법 불합치 여부를 심사한 후 본회의에 상정하도록 입법제도를 보완하기로 다.

심사기한은 최장 30일 이내로 한다고 못을 박아버렸고, 아홉 명의 판정위원은 기존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정 위원장이 불시에 헌법재판소를 쳐들어간 사건이 발생하고 딱 이주일이 지났을 때 어쩌면 헌법재판소의 마지막 판결이 될 수도 있는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지고 있었다.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종일관 아무런 표정이 없던 헌법재판소장이 마지막 한 줄을 남겨두고는 의식적으로 두 눈을 껌뻑였다.

생각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처절하게 애쓰는 모습이 TV 생중계를 지켜보던 팔천만 국민들의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따라서 이 사건 위헌법률 심판제청은 재판부 전원일치의 결정으로 기각한다!”


한바탕 온 나라를 뒤집어놓았던 대고려연방 최초의 부동산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정 위원장의 관저 주변은 모처럼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북쪽 다섯 개 주 도처에서 몰려들었던 그 많던 민원인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대신 그 자리에는 목란 꽃들이 소복이 쌓였다.

정 위원장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나씩 놓아둔 것인데 어느새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정 위원장 내외가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복받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부인이 정 위원장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가만히 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던 정 위원장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었다.


사실 이번에 정 위원장은 ‘민주주의의 패륜아’라는 국제여론의 조롱까지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소임을 마다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자신을 믿고서 통일 대장정에 따라나선 북쪽 인민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제 허허벌판 무한경쟁지대에 내몰리게 된 인민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정 위원장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집단농장과 국유재산을 골고루 분배하여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친인민적인 따듯한 조치들이 있었기에 90년 가까운 정 씨 일가의 통치행위도 역사적인 합리성을 갖출 수 있었다.

비록 대단히 거친 방식이기는 했지만 북쪽 인민들의 재산권은 이제 온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정 위원장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그들 내부의 의존현상은 더욱 강화되었으니 앞으로 북쪽 다섯 개 주가 풀어야 할 큰 숙제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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