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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건강관리 (3)

생각보다 빨리 정리되었다.

by 양단우 Feb 13. 2025

다단계에 발을 들인 정화는 어느 순간부터 지갑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택배 박스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행히 사업을 한다는 소리까진 하지 않았지만 한두 푼이 아쉬운 형편에 다단계 물품들을 사들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정화는 주스 분말부터 해서 비타민제, 영양캡슐 등을 구매하게 되었다. 한 번은 한 박스에 거의 40만 원 정도나 되는 물품들이 담겨 있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먹겠니.... 내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


정화가 간혹 이런 소리를 하면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나이가 많아 무릎도 크게 다치고 허리도 아파서 곧잘 등을 두드리는 정화. 그런 정화에게 어느 정도 선을 넘어서는 잔소리를 했다가는 정화가 너무 의기소침해할 것만 같았다. 나는 잔소리를 더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다만 적정 금액 안에서만 구매하고, 주변에 판매는 하지 않을 것이며, 주변에도 전하고 싶다면 그저 아무 대가 없이 물품을 나눠주는 것으로만 하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에 정화는 흡족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다단계 교육장으로 나갔던 정화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아니,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이제는 가지 말아야겠다."

"왜요?"

"밥도 알아서 사 먹으라고 하고 푸대접하지 뭐냐."

"신입 회원들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데 뭘 그러세요, 당연한 것을."

"그래도 사람이 갔으면 사람대접을 해줘야지 원."


정화의 말에 의하면 조직에 적응하는 걸 알아챈 다단계업자들이 정화에게 점점 소홀히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땐 알아서 계산을 하라고 핀잔을 주거나, 자꾸 사업을 같이 하자고 부추겼다고 했다. 교육장에 가도 눈치를 주거나 민숭맨숭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이전에는 환하게 웃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싸늘해지니 정화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자주 연락 오면 다단계업자들의 전화도 부쩍 뜸해진 것만 같았다. 자주 전화를 붙잡고 있던 정화는 멀뚱하니 앉아서 TV만 보고 있었다.


"사업을 같이 하면 한 달에 ㅇㅇㅇ원은 기본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돈이 많은데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니."


기분이 상한 정화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돌아왔다. 출출하다면서 김치냉장고에서 겉절이를 꺼내면서 정화는 퍽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김치를 으적으적 먹는 정화에게 원래 장사 속이 그런 거겠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너무 한 것만 같다고 말했다. 정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며칠 뒤, 택배 박스가 도착했다. 택배 겉면에는 그 다단계 업체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택배 박스를 들고 들어오면서 정화에게 아직도 이걸 찾느냐고 핀잔했다. 그러자 정화는 물건만 샀다면서, 그곳(교육장)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거라며 되려 소리쳤다. 나는 손을 저으며 말하다가, 곧 박스를 풀어 물품을 꼼꼼히 살피는 정화를 바라보았다. 정화는 이리저리 살펴보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같이 흠 잡힐 데가 있는지를 관찰했다.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사람들 만나면 좋잖아."


내가 다단계에 대해서 뭐라고 할 때마다 정화는 종종 이런 말을 해왔다. 정화의 대꾸에는 80%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20%가 점심을 먹기 위해서, 10%가 교육장까지 가는 외출이 좋아서, 가 섞여있었다. 정화는 다단계 물품을 사들이고 그걸 주변에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것에 의의를 두지 않았다. 정화가 원한 것은 다만, 노인의 고독함과 외로움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정화의 외출이 빈번해졌고 활기가 차올랐던 건 사실이다. 그런 정화에게는 무슨 사업을 한다는, 엉뚱한 환상보다 한 번이라도 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했다. 가족 이외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직장생활을 하며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했던 지난날을 떠올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잔뜩 시무룩해진 정화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런 마음이 더욱 느껴져서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사람이 그리워서, 정이 고파서, 단지 그 때문에 다단계까지 찾아간 정화가 참 가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어떤 드라마에서도 노인들을 상대로 다단계 업체가 교육을 시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는 다단계의 목적이 사기였지만, 다행히 우리가 처했던 현실에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정화는 손을 잡아주는 것,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 마음을 써주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정화의 한숨에서 이런 마음들이 읽히니 이걸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싶은 고민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정화의 신체적인 건강 만을 생각해 왔는데, 정화에게는 정신적인 건강도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몸만 건강해서도 안되고, 마음만 건강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둘 다 건강해야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필라테스를. 문화센터에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자리를 말이다. 다단계 대신 필라테스를 알게 된 정화는 다시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 근력을 기르는 동시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몰토크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건강한 모임을 갖게 되니 정화도 미소를 되찾게 되었다. 게다가 며느리도 함께 운동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필라테스에 금세 적응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정화는 교회에서 봉사활동도 하게 되었다. 교회 모임에서 비슷한 연배인 분들과 함께 소통하면서 그룹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장 김치를 담가 지역 내 행정복지센터에 기부를 하기도 하고, 일요일에는 식당에서 요리솜씨를 뽐내며 교회 식구들의 점심을 챙겨주기도 한다. 마당발로 뛰어다니니 주변분들이 카톡을 자주 보내 심심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정화는 이제 카톡이 너무 많이 온다며 휴대전화를 진동 모드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정화는 이에 만족할리 없었다. 정화는 새로운 건강계획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정화와 함께 찾아간 여행지에서 각자의 소원을 담았다. 나는 정화의 건강을 놓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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