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
눈앞에 동그란 검은 그림자가 둥둥 떠다닌다. 누워있는 나를 위해 조명 밝기를 조절해 주긴 했지만 바로 누워 불빛만 바라보고 있자니 눈앞이 자꾸 깜깜해진다. 환한 것의 중심을 똑바로 쳐다보면 도리어 까매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태양을 바로 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번번이 실패했다. 곁눈질로 보는 듯 마는 듯해야 빛의 중심에 아주 겨우 조금 가까워질 수 있었다. '가까움'이 어느 정도일 때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었다. 어둑한 것을 좋아할 때가 있었다. 어둑한 옷을 입고, 어둑한 거리를 걷고, 어둑한 조명아래서 눈을 찡그린 채 책을 읽고, 어둑한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여전히 어둑한 것이 좋았다. 어둑함을 만드는 건 빛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빛을 쫓게 되었다.
내 뱃속은 어둑할까. 아주 깜깜할까. 태아도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아이도 빛을 쫓고 있을까. 기어코 빛으로 나온 아이는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할만했을까. 나는 무릎을 굽혀 세운 다리를 어정쩡하게 벌린 채로 두 시간 가까이 딱딱한 베드 위에 누워있다. 여러 차례 주입된 마취제와 늘어난 자궁이 제자리를 잘 찾아가라고 아랫배 위에 올려놓은 냉팩으로 몸이 달달 떨렸다. 몸은 피곤한데 각성된 정신은 이생각, 저생각, 별생각 사이사이를 돌아다닌다.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다. 간호사들도 없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펑펑 울고 싶어 진다. 그런데 눈물이 펑펑 나지는 않는다. 흐르던 눈물이 금세 그치고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싶다.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린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도 진짜 물리적인 엄마가 되었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출산하면 엄마가 떠오른다는데, 일찍이 헤어진 엄마보다는 두 아이를 먼저 출산한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가 느꼈을 감정을 실제론 알지 못하면서 지금 내 감정을 대입해 언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남편과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이를 신생아실로 옮기고 입원실을 준비하고 돌아온 남편이 촉촉한 내 눈을 바라보다, 아이를 담아 온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낯설기만 한 아이가 두 눈을 한껏 찡그린 채로 입을 있는 힘껏 벌리고 있다. 멈춰있는 사진에서도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른 영상 속에서 아이는 감은 눈을 더 감으려 하며 잠에 빠져들고 있다. 입체 초음파에서 확인했던 아이의 바가지귀가 영상 속 아이와 똑 닮아 있다. 그제야 아이가 태어났음을, 내가 아이를 낳았음을, 내가 엄마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자연분만하면 거의 바로 입원실로 갈 수 있고 회복도 빠르다는데 나는 피를 많이 흘렸다. 위에서 간호사가 누르고 아래서는 흡입기를 사용하는 난산이었다. 출산 후 후처치를 했는데도 피가 계속 흘러 살펴보니 자궁경부까지 찢어져 국소마취제를 사용해 꿰매는 후처치를 한 번 더 했고, 두 시간 이상 분만실에서 경과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이제 내려가도 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히 일어나 휠체어에 옮겨 앉았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어지러울 수 있으니 먼 곳을 응시하라는 간호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더니 그새 눈앞이 깜깜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무너진다. 오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자꾸만 까먹는다. 입원실로 들어와서야 몸에 긴장이 풀리며 아이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면회시간이 지나 오늘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말에, 익숙한 곳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홀로 있을 아이는 괜찮은 건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입원실로 들어오자마자 배가 허전해진 만큼 허기를 느끼며, 늦은 저녁으로 받은 고봉밥과 미역국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어치우고는 몸을 뉘었다. 삶에 대해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진통을 느끼면서 그렇게 '살려달라'라고 외치고, 이렇게 허기진 배를 느끼는 걸 보면, 참 살고 싶은 것이, 살아내고 싶은 것이 본능이구나 싶다. 오늘 만큼은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살려달라고 울고 허기지다고 울고 그랬을 아이가 안쓰럽다.
새벽 6시 조금 넘어 집에서 출발해 병원에 왔는데, 어느새 시곗바늘은 꼬박 한 바퀴를 조금 더 돌아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시간이 흘렀다. 침대 옆 바닥에 딱딱한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뒤척이는 남편을 느끼며, 어둑해진 방안에 천장을 바라보다가 사진 속 아이를 떠올렸다. 여전히 내 아이 같지 않은 아이가, 여전히 엄마 같지 않은 내가 앞으로 어떤 시간들을 서로 나누게 될까. 아이가 세상을 마주한 날. 내가 엄마가 된 날. 여러 날 중에 한 날이지만 우리 둘에게는 참 특별한 날. 아이의 생일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도 특별한 날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이가 내 옆에 있진 않지만, 이 날이 흘러가는 게 아쉽다.
아이와 함께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가. 이 모든 게 낯설어서 '사랑'이라는 감정도 낯설게 느껴진다. 열 달이라는 시간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속에 아이에게 수없이 사랑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사랑이 낯설다. 쏟아지는 졸음에 생각과 감정이 서로 섞이지 않고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도록 내버려 둔 채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나와 이제 알아가야 하는 아이가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