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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7. 2022

할머니 냄새

우리 외할머니는 키가 크고 마른 몸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셨다. 할머니의 일자로 쭉 뻗은 다리를 보며 나도 우리 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다니셨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머리맡에 비녀를 뽑아두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내린 채 그대로 주무셨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손질을 하여 비녀를 꽂으셨는데 희끗희끗해진 긴 생머리를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동백기름을 발라 참빛으로 빗어내리면 반짝반짝 은빛이 났다.

할머니가 항상 입고 다니시던 긴 치마 안에는 신기하게도 복주머니가 들어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시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복주머니 안에서 동전을 꺼내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그 주머니 안에는 박하사탕 몇 개가 항상 들어 있었는데 가끔 그것을 먹으라며 내어주셨지만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왜 하필 맛없는 박하사탕일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이모가 산소 앞에 박하사탕을 놓는 걸 보고 알았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한 주전부리였다는 걸.


우리 외할머니의 치명적인 매력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담배였다.

요즘의 할머니들에게서는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지만 그때만 해도 담배에 대한 인식이 요즘과 같지 않아서 집에 손님이 오시면 담배를 태우시는지 여쭤보고 담배를 권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때는 그게 나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예의를 차린 일종의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들이 담배를 피우시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또 그런 할머니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빠는 할머니께 드릴 담배 몇 보루를 꼭 사 가지고 왔다.

우리 집 가운데 방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으면 마루 끝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계시던 할머니가 보였다.

그 옆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져보였던지, 또한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의 표정이 너무도 평온해서 담배 맛이 얼마나 궁금했던지. 여담이지만 할머니가 버린 꽁초를 몰래 주워다 입에 물고 숨을 들이켜다가 눈물 콧물을 쏙 뺐던 기억이 난다. 분명 외할머니는 담배가 맛나다고 했는데 큼큼하고 고약한 연기 맛만 났다.


초등학교 시절 또래보다 작고 약해서 운동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내가 운동회를 그렇게 기다렸던 건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때는 운동회를 하면 가족들이 모두 왔을 만큼 학교의 크고 대표적인 행사였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빙 둘러가며 돗자리를 펴고 앉아 나를 보고 있을 우리 가족을 찾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우리 학교는 봄에 소운동회 가을에 대운동회 두 번을 했는데 할머니는 대운동회 때마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셨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 따끈따끈한 밤과 고구마가 담긴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마치 학처럼 고고하게 걸으시면서.

우리 할머니를 본 친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다. 할머니가 키도 크시고 날씬하시고 게다가 허리를 펴고 걸으신다고. 그게 어지간히 신기했나 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겼던 것도 같다.

나는 달리기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빨리 박을 터트려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른 친구들 자리에서 기름진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겨 와 참기 힘들었지만 엄마가 싸온 김밥은 어느 집 김밥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 최고였다.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가 삶아 오신 밤은 모든 음식 중에 최고였다. 그 밤이 왜 그렇게 맛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밤보다 맛난 밤은 먹어보질 못했다.

가슬가슬 투박한 손에 꼭 쥔 작고 무섭게 생긴 칼로 껍질을 벗겨 내 손바닥 위에 하나씩 올려주신, 담배향(할머니에게서 나는 담배냄새는 어쩐지 좋았다)이 은은했던 외할머니의 품 냄새가 베인 그 밤맛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혀로 맛 본 그 맛이 머리와 가슴에 그대로 박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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