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에서 길을 잃으면 흐르는 물을 따라가야 한다

by 파란동화


아오... c 바... 텐트에 누워 잠을 자면서도 계속 욕이 나왔다.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산에서의 밤은 한여름에도 춥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름 준비 한다고 했는데도 추위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월 3일의 밤이 한겨울만큼 추웠다.



지친 몸을 눕혀 저녁 8시부터 잠을 청했는데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200번은 반복한 것 같았다. 이제 새벽 3시쯤 되었겠지? 세 시간만 더 버티자, 하고 시계를 봤더니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 아오 씨!!! 이 짓을 6시간이나 더 반복해야 하다니! 내가 미쳤지, 백두대간은 뭔 놈의 백두대간이야! 아오...



배낭에 있던 여벌의 등산복과 고어텍스 점퍼와 다운내피를 모두 꺼내 몸에 두르고도 너무 추워서 김장비닐을 꺼내 몸을 집어넣었다. 어딘가에서 들었다. 보이스카웃 친구들이 다같이 야영 할때 커다란 김장비닐에 들어가서 잔다는 얘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절대로 그러지 마시길! 비닐은 비닐일 뿐, 김장비닐이 보온성을 잡아주기는 커녕 몸에서 빠져나가는 열기만 잡아서 침낭을 축축하게 만드니까. 침낭이 젖어도 따뜻하기만 하다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웠다.



날이 밝으니 새소리가 싱그러웠다. 그리고 내 마음 속은 징글징글 했다. 어제의 고된 산행으로 1차 공격을 당하고 저녁부터 몰려온 추위에 2차 공격을 당한 내 몸은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너덜너덜했다. 칠십 먹은 노인처럼 몸이 굽어 펴지지 않았다.



골룸처럼 기어서 계곡으로 갔다. 나에게는 물이 필요했으므로. 그렇게나 고된 산행을 하고도 밥을 먹지 못해서 아사하기 직전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몸은 만신창이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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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이 너무 차가워서 끓인물을 섞어 세수하고 양치했다. 밥이 지어지는 동안 간밤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래봐야 자다깨고 자다깨고 하면서 욕나온 얘기 뿐이었지만) 고개를 들어 숲의 아침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따뜻한 물로 세수도 하고 식사전 뜨거운 차로 속을 달래주었더니 어제와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아침,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서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차 한잔을 할 수 있는게 어디랴!



등산을 다니면 언제나 배낭을 풀었다 싸는게 일이었는데 야영을 하니 텐트까지 곁들여져 할 일이 몇 배나 늘어난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어 먹고 배낭을 다 싸서 모든 마무리를 짓기까지 정확히 3시간이 걸렸다. 헉헉...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하지만 기분을 털고 다시 종주를 이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으니

나는 다시 길을 이어가리라!



하지만 발걸음을 옮긴지 1분도 안되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도저히 대간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사람들이 야영을 한 흔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어디로도 길은 없었다.



원래 나의 목적지였던 대간령에서 미시령을 거쳐 설악산 황철봉, 세존봉으로 가는 길은 국립공원에서 지정한 통제구간이었다. 통제구간이지만 대간 타는 사람들은 통제를 무시하고 진행하곤 하는 길.



국립공원 직원의 단속에 걸리면 벌금 10만원에 처해지는 불법행위였지만, 통제구간마다 국립공원 직원이 보초를 설 만큼 인원이 충분치도 않았고, 또 단속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여유로운 중년의 등산자들에게 10만원은 돈도 아니었으니까.



통제구간은 그만큼 자연이 보존된 곳이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 곳은 왠지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환상이 있어서인지 벌금 10만원을 입장료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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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통제구간도 이어갈 생각이었다. '이어갈 생각이었다' 라기 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눈 앞에 길이 있으면 가는거고 없으면 돌아가는 거다. 초보 등산자에게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 하루 겪어보니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것 같았다. 개방구간을 걸으면서도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나같은 사람은 통제구간에서는 더욱 길찾기가 어려우리라. 벌금은 둘째치고 진짜 조난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두대간이 결코 만만한게 아닌 것이다.



그래! 일단은 살고 보자.

통제구간은 깔끔하게 건너 뛰고

개방구간으로만 다니자!



그러니 이쯤에서

대간길 찾는 것은 그만두고

마을로 내려가자!



나는 계곡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물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계곡으로도 길이 없기는 매한가지 였다. 길도 없고 물가를 따라 내려가자니 툭하면 절벽에 가로막힌다.



산에는 길이 없고

계곡엔 절벽이 즐비하고



하는 수 없이 등산화를 벗어 계곡을 가로지른다. 앗 차거! 계곡물에 발이 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했고 그러려면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후로도 나는 등산화 벗고 신기를 여섯번은 더 반복해야 했다.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일까?

나는 왜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하지만 계곡이 아름다웠고 계곡을 이룬 바위도 매력적이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바위가 매력적이어서 가다말고 너럭바위에 앉아버렸다. 그리곤 곧 떠오른 생각.



아, 맞다!

물을 만나면 꼭 할 일이 있었지.



나는 비누를 꺼내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바위에 앉아 햇볕에 젖은 머리를 말렸다. 넓은 계곡으로 10월의 가을볕이 무한정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날의 날씨가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하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종주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가다말다 가다말다 하며 종주를 계속 이어갔을수도, 혹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안전한 국립공원 외에는 산을 찾지 않았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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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끔씩 그 날의 그 계곡, 그 바위 위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계곡이라고 하면 지리산과 설악산의 계곡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롱한 물빛으로 아름다움의 대명사를 차지하지만



내 기억속 첫번째 계곡은 언제나 그 날의 계곡이다. 대간길을 잃어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던, 넓은 바위와 10월의 햇살을 모두 품은 그 계곡.



당시엔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그 차가운 계곡을 몇 번이나 맨발로 건넜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배낭엔 텐트도 있었고 식량도 있었다. 그런데도 할 일 없는 백수는 왜 그토록 쉬지 않고 걸어야만 했을까?



지나온 나의 삶이 그날의 대간길 같았다.

목적도 불분명하고 길을 잃은 것 같아도 무작정 달리기만 했었다. 달리기를 멈추면 나의 생은 그대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쉬면서 물이 흘러가는 모습도 보고 새 소리도 듣고, 가만히 앉아 햇볕에 머리를 말리는 여유라고는 없었다.



버팀목이 되어줄 부모가 없으니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강박이 강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은 모두 적금에 쓸어넣었고 그래서 쇼핑도 여행도 나에게는 모두 사치였다. 그렇게 내 자신을 옭아매며 서른 두 해를 버텼다. 나의 지나온 삶은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저 '버티기만' 한 시간 같았다.



혹여라도 넘어질까 고심하며 버티기만 하는 삶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 서른 두 해를 살면서 내가 가장 '살아있던' 때는 오직 산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는 기를 쓰고 계곡을 건넜다.



나의 삶을 살기 위하여.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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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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