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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Sep 13. 2021

가족이라는 환상

사랑은 추상적이다. 사물처럼 실체가 명확하고 뚜렷하지 않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그 모호함은 당혹감을 남긴다. 어떻게 다루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달아오를 만큼 사랑을 나누던 기억 아득하다. 무엇을 꺼내도 마음에 사랑의 온기는 한 줌도 지 않다. 가족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관계일까? 사랑을 태우는 관계일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옭아매고 있을까?


오십에 접어든 남편은 사춘기를 겪는 소년처럼 감정변화가 심하다. 별안간 호통을 치고 짜증을 낸다. 예측할 수 없어 곤란하고 난감하다. 사춘기도 이기지 못한다는 갱년기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는 갱년기를 부정한다. 종일 침대에 누워있거나 별 것 아닌 일에 트집을 잡고 참견을 한다.


일요일 아침의 나른함에 젖어드는 시간, 삼 남매는 핸드폰 영상을 보면서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있다. 자기 남편이 소리를 지른다. 날카롭고 모난 말들이 작은아이에게 쏟아졌다. 꾸중이라고  수 없는 모나고 구겨진 마음의 찌꺼기들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늘어져 있던 나도 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식간에 일요일 아침의 평화가 깨졌다. 급작스런 상황,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몹쓸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점점 잦아지는 그의 돌발이 당황스럽다. 낯설고 불하다.  '아.. 이거 또 시작이네.. 요즘은 좀 잠잠했는데.. 일요일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람.. 어휴.. 이번 주말도 막하' 사춘기의 문턱에 선 아이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티키타카 퐁당퐁당 틱틱틱 쿵쿵쿵.. ' 사춘기와 갱년기가 싸우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작은 아이가 울고 말았다. 사춘기가 갱년기를 이기지 못했다. 아이 앞에서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아이의 억울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답답함에 분통이 터질 것이다. 가족이니까 모든 것이 경계 없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말을 듣지 않으니 혼나야겠다며 회초리를 들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이 허용되는 시절이었다. 사실 사랑의 매는 없다. 애초에 사랑은 폭력을 전제하지 않는다. 매가 주는 아픔은 사랑이 아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용인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왜 맞아야 하는지 뭘 잘못한 것인지 이유도 모른 채 맞았다. 잘못하면 맞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반항과 저항을 모르는 순응에 길들여진 어린아이였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변한 엄마의 얼굴이, 날카로운 신경질로 채워진 목소리가, 두껍고 따가운 회초리가 무섭기만 했다. 그녀 앞에서 기죽은 채 움츠러든 내 모습을 떠올린다. 웅크렸던 작은 아이, 나약한 어깨가 떠오른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 내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이 아이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가 있다. 무서운 일이다. 잊고 싶었던 기억은 여전히 현재를 지배하고 다. 무례한 아빠를 향해 몸부림치듯 우는 아이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남편 갱년기가 불편한 이유이다.


엄마는 나에게 몸이 약하다며 못하게 하는 것이 많았다. 실제로 체력이 좋지 않았지만 체력이 좋아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약하다는 이유로 내가 하려는 일을 제한했다. 반복됐던 그 말은 무의식에 남아 지금의 나를 움직인다. 강한 몸을 욕망하고 가만히 늘어져 있지를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넘어설 수 없을 거라고 견디지 못할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경계를 짓는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쉽게 압도되 엄마의 말을 재현하듯 스스로를 제한한다. 면화된 엄마의 말은 현실을 회피하여 도망갈 구실이 되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본다. 어린 시절의 그를 나는 잘 모른다. 그도 나도 서로의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린 날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  부모가 되었다.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고지식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주부였다고 했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유별났지만 아버지의 딸 사랑은 투박했다고 했다. 다정한 부모 곁에서 충분한 애착을 받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고 그것이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부정하고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날의 그가 사춘기 아이로 인해 도전받고 있다. 상냥하기만 했던 딸이 사춘기 전사로 돌변했다. 조용하기만 하던 아들이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감정을 회피하려고 일에만 몰입하는 남자였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을 억하던 아버지 앞에서 초라했던 어린 날의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갱년기는 이제껏 소홀했던 내면을 살피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과민한 나와 버릇없는 아이들 때문이라 말한다. 사춘기 소년처럼 널뛰는 감정을 어른 충고 포장한다. 자신의 감정도 읽지 못하는 그는 딸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한다. 내면의 결핍을 외면하는 데 익숙한 그에게 감정 읽기는 어려운 일이다. 도무지 어떻게 할지 몰라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아이 앞에서 당황하는 에게서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를 남겨둔 채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어린 날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과거의 아버지와 어린 날의 그 반복하며 상처를 되새기고 있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 번도 대들어 보지 못했던 어린 날의 그를 아들에게 강요한다.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누나에 대한 분노를 딸에게 투사한다. 자신의 길을 가겠다 맞서는 아들 앞에서 그는 폭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린 그가 해소하지 못한 응어리진 욕구 삐뚤어지고 있다. 아픈 부모를 홀로 간병하며 은폐했던 감정들이 뛰쳐나오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세계의 허약함과 빈약함을 정하고 온전히 자신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그와 나는 부모가 되고서야 어린 날의 자신과 그때의 부모를 기억한다. 우리의 의식은 부모가 된 현재의 나와 어린 날의 나를 오가며 내부에서 찢기고 갈라져 끝없이 다투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그림자와 내가 엮어낸 환상으로  그림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어른이라는 환상,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다는 환상, 너는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환상, 환상으로 꾸며진 세계가 무너진 곳에 진짜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안의 결핍과 상실을 직면해야 환상을 걷어낸 실재의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사가 귀찮고 불만인 남편의 얼굴은 큰 아이와 다르지 않다. 대에 붙어있는 모습이 똑같은데 서로 아니라며 발뺌을 한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서로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맞춰달라고 칭얼댄다. 우리 집에는 어른이 없다. 집에만 오면 어린아이가 되는 사람이 다섯 명이다. 가족은 모나고 각진 구석을 서로의 어떤 곳에 덧대고 맞추면서 살아간다. 사랑을 하는 게 어떤 건지 몰라서 서툰 감정과 정제되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 채 내내 싸우면서 상처를 낸다. 가족은 매일 시끄럽 지긋지긋게 사랑을 앓는 이상한 세계다.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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