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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Aug 02. 2021

내편이라는 착각

그는 또 텔레비전을 켜놓고 졸고 있다. 야근과 회식으로 채워지는 일주일 중 하루, 오랜만에 집으로 귀가했지만 저녁을 먹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집은 잠자고 옷을 갈아입는 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직 일을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내가 어떻게 지내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주말이 되면 몰려오는 피로를 주체하지 못해 계속 졸기만 한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늦은 밤에 깨어나 밤이 새도록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놓지 못한다.


결혼 15년 우리는 엄마와 아빠라는 의무와 역할에 충실할 뿐 서로에게 무심하다.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전화기 너머 숨소리를 확인하던 시절은 잊어버렸다. 서로를 향해 날 서고 모난 소리를 하며 악다구니를 쓰던 때도 있었다. 뜨겁게 서로를 원하며 탐하던 시절도 있었다. 수없이 실망하고 상처받기를 반복하다 무던해진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으며 아무렇지 않게 구박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체념했다.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 화를 내보아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불과 며칠 전 세탁했던 래통은 다시 가득 찼다. 바닥에는 아이들이 흘리고 간 음료 자국이 진득하다. 흩어진 장난감, 굴러다니는 과자봉지, 물기 젖은 수건, 잡다하지만 손대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나는 것이 집안일이다.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많다. 그냥 눕고 쉽고 쉬고 싶지만 그대로 두면 집안은 금세 엉망이 된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집안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집안을 종종거리다 화를 내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하기 싫으면 너도 하지 마!' 화를 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에게 집안일이란 당장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인 일인 것이다. 주말에도 종일 집안을 종종거리며 서성대는 것을 모르는 척한다. 내가 하지 않아도 그녀가 하고 있고 할 일이라고 여긴다. 


흑백사진 속 그와 그녀는 군더더기 없이 환하고 밝다. 모든 바라던 것의 총합이 그들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꿈꾸는 미래였다. 하지만 부부로 사는 것은 열망이 사라진 자리에 절망 채우는 일이었다. 그녀는 거센 파도를 마주모래성처럼 서서히 으스러져가는 마음을 보았다. 바라고 원하는 것들의 목록에 체념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사랑을 확인하는 찰나 뒤에는 많은 의무와 책임이 남았다. 사소하고 잡다한 일상의 목록들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주함으로 흩어져갔다. 아이를 달래고 어르며 보낸 수천 번의 밤으로 그녀는 소모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환상으로 지어낸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막막한 그 길에서 그녀는 우울했고 외로웠다. 끝장을 내겠다고 시작한 싸움에서 그녀는 기괴하게 변해버린 사랑을 확인했다. 폭발하듯 터져나가는 감정들 너머로 끓어오르는 적의와 무관심, 분노, 욕구가 사라져 다. 손만 데어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롭고 뾰족한 말들 사이로 숨어든 진짜 속마음을 보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던 감정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한탄하는 일을 반복했다.


막내가 성장하면서 늘어나는 짐과 아이들 각자의 공간이 필요했다. 이사를 준비했다. 코로나로 계속되는 가정보육과 이른 더위와 장마에 긴장과 피로가 쌓여가는 때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두 남매와 집을 살펴보았다. 현실적인 여건에 맞는 집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간과 마음을 써야 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사할 집을 찾겠다고 했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굳이 지금 이사를 해야겠냐는 말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비난과 냉소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비난부터 하는 그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감정이 요동치고 고성이 오고 갔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그와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 비아냥과 조소를 듣겠다고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와의 대화는 이런 방식으로 반복되고 생채기를 남겼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의견이 필요한 일상의 일들을 묻지만 그는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황을 분석하고 회피하려는 데 급급하다 보니 비슷한 말을 반복하다 지쳤다. 대화로 시작해서 다툼으로 끝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잘못하는 것도 없는데 이유 없이 비난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 싸움의 이유가 나 때문인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해결하지 못한 채 묻어두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마음이 시끄러웠다.


고압적인 태도를 보다 못해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가 당신한테 이런 말을 들으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게 아니에요. 이럴 거였으면 혼자서 결정하고 알려주면 되는 거였어요. 어떻게 결정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막막할 때 상의할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못 생각했네요." 서로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우리는 더 많은 분노와 더 거친 말을 쏟아놓고 있었.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일까? 부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일그러지게 만든 것일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서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절망하고 포기해야 편안해질 수 있을까? 과연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있기는 한 까?  오래된 사진 속 기억은  되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좀 더 간단했을지도 모를 우리, 부모라는 이름으로 묶여버 우리,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사진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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