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1. 그는 섬세하다.
대화가 막히면 대신 말을 이어주고, 회의가 길어지면 공기를 살짝 눕혀놓는다.
누구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먼저 움직인다.
그가 있으면 일은 매끄럽게 돌아가지만, 이상하게 다들 말을 조금 아낀다.
그리고 그 침묵이, 어쩐지 더 편해 보인다.
2. 그는 다정하다.
하지만 그 다정함엔 늘 계산된 여백이 있다.
상대의 틈을 알아차리고, 그 틈을 다듬듯 메워 자신의 자리를 단단히 세운다.
그가 다녀간 자리는 단정하지만, 공기엔 미묘한 긴장이 남는다.
3. 그는 사람을 도우면서 천천히 중심에 선다.
그리고 기대게 만든다.
어느새 혼자 하던 일조차 자신이 없어진다.
그는 그 지점을 정확히 안다.
그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그는 아주 잠시 미소를 짓는다.
4. 도움을 받는 일에 미안함이 스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다음 일을 대신 해둔다.
그는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존재로 안심받는 사람이 된다.
그의 친절은, 그렇게 완성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그의 방식으로 숨을 쉰다.
5. 그가 떠나면 공기는 잠시 텅 비고, 남은 사람들은 어딘가 흐트러진다.
고맙고, 조금 억울하고, 이유 없이 무력하다.
그의 친절은 다정함으로 시작했지만, 끝내 힘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그래서 어떤 친절은 폭력보다 오래 남는다.
그건 다치게 하지 않고, 대신 조용히 작아지게 만드는 온기다.
그의 친절은 타인의 의존 속에서 아주 천천히 길들여지는 관계다.
돕는 손끝으로 힘의 중심을 바꾸고, 결국 모든 다정함이 자신을 향하게 만든다.
그건 ‘자기애적 공급(타인의 감탄과 의존으로 자신을 유지하려는 욕구)’이라는 이름의 조용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