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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0. 2024

게으름

1. 우리는 참 바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 카페에서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들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보면 저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왠지 여유를 누린다는 게 꼭 여유가 있어야만 그런 것만은 아닐 텐데 여유를 가져볼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은 몸도 마음도 참 바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2. 게으름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게으름인지 여유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여유는 해야 할 일도 하면서 충분히 쉼을 갖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재충전이 되었다면 여유이지만, 오히려 피로나 후회가 더 생긴다면 게으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게으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두려움’과 ‘무능감’ 때문입니다. 무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에 더 무능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으면 움츠러들고 피하고만 싶어 집니다. 피하고 싶으니 게을러지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쉽게 싫증을 많이 느끼기도 하는데 인생의 ‘큰 그림’을 갖고 있지 않거나 갖고 있더라도 잘 보지 않습니다. 싫증을 견디기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즉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중독’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4. 게으름은 완벽주의적 성격이나 수동 공격적 성격 유형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와 회의주의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는 동시에 회의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완벽해져야 하지만, 반대로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완벽에 대한 도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완벽을 추구할까요? 성취 지향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나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함’이 있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 공격적 성격 유형 분들의 게으름은 사실 ‘시키는 것은 하기 싫어.’라는 뜻입니다. 말로 표현하기보다 늑장을 부리거나 딴짓을 함으로써 상대의 속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게으름은 분노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5. 자녀를 둔 분들에게 “아이가 게으르고 공부를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얘기를 자주 듣곤 합니다. 꼭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양육 방식이 통제적이지 않은지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통제적이라는 것은 자녀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다는 뜻이고, 자율성을 침해받은 자녀는 부모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부모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방식, 즉 게으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율성이 침해받음으로써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기회가 박탈됨으로써 삶의 능동성을 발달시킬 기회를 갖기 어렵습니다. 능동성이 박탈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해도 어차피 안될 텐데’라는 무력감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부지런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지런한 척하는 게으름 일 수 있습니다.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있다 온다고 해서, 학원을 많이 다닌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은 아이는 아닐 테니까요.   

   

6. 제가 생각하는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삶의 목적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상담실에 오시는 많은 분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기로 살지 못하는 삶’이 준 고통입니다. 사회적 성공이나 외적인 성취가 강조되는 경쟁 사회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틈이 없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나의 색깔을 잃어버린 채 남들의 뒤만 쫓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내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외부적 보상에 따라 쉽게 흔들리지 않고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내적 동기가 아닌 외부적 보상에 따라 삶의 목적의식이 좌우된다는 것은 외부적 보상이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 목적의식은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니까요. 

‘내면의 나’와 ‘외면의 나’의 차이가 클수록 삶은 고통스럽고, 진짜 나로 살지 못하고 진짜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언젠가 우리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시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지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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