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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7. 2024

부모를 원망하는 게 왜 어려울까요

도덕적 방어

1. 우리는 살면서 부모에 대해 원망을 갖기 마련입니다. 큰 어려움 없이 부모에 대한 원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부모가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충분한 사랑과 이해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담실에서 어떤 분들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부모님에 대해 좋은 점에 대서만 얘기하시거나 완벽한 분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현실을 부정하는 듯합니다. 불행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겪는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2. 부모가 정서적으로 결핍을 주게 되었을 때 자녀가 부모의 나쁜 측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대상관계 이론가인 페어베언은 ‘도덕적 방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이미지를 보호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 대신, 부모의 해로운 모습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옵니다. 부모를 좋은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언젠가 사랑해 줄 거야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고 나쁜 부모와 관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악마만 있는 세상에서 천사로 사는 것보다 천사들만 사는 곳에 내가 악마로 사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나만 천사라면 악마들에게 괴롭힘 당할 것이고 세상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내가 악마이고 세상이 다 천사라면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악마가 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이런 분들은 세상은 다 괜찮고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힘들게 하는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인관계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맞추려 하는 분들이 이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동등한 관계를 맺기보다 자신이 피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희망의 끈을 놓치기 않기 위해 처음엔 부모를 그리고 현재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도덕적 방어’를 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한 지나친 배려는 부모의 자기애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모습이었고, 이런 헌신은 의무감으로 하는 것일 테니까요.     

 

5. 페어베언은 진짜 나쁜 부모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을 연구하면서 보니 이들은 부모를 진심으로 욕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대상으로 유지하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따뜻하고 신뢰로운 경험이 꾸준히 필요합니다. 누구나 좌절스럽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다른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상처를 받고, 견뎌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심리상담을 받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이유는 결국 달라지고 싶고, 이런 절실한 동기들은 내 안에 좋은 면을 복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의미 있는 관계들을 통해 복구되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악마 같은, 천사 같은 사람들만 있는 세상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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