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중학교까지 성적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고 친구 관계도 별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성적이 곤두박질친 게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보였습니다. 중학교까지 잘 지내보였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와서 특히 선생님들과 수시로 갈등을 빚었고, 온갖 말썽으로 학생부실과 교무실에서 교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른들과 유독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부모와 어떤 어려운 점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물었습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뿐 대답이 없습니다. 팔에 칼로 그은 흔적들이 보여 물어봤더니 모른 척합니다. 얼핏 보긴 했지만 어림잡아도 수십 군데 상처들이 보였습니다.
2. 이 학생이 자해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팔에 칼로 긋고 피가 나오는 걸 보면 체한 게 내려가듯 시원한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자해하지 않을 때는 체한 느낌으로 지내는지 물어봤으나 별 대꾸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몸에 상처를 내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삶에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답답하고 체한 느낌을 갖고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3. 나중에 들은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크기 때문에 부담스러웠고, 네가 원하는 걸 하라고 말씀은 하시지만 보이는 모습들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길 바라시는 것 같다고. 평소에 무언가 요구하거나 하시진 않지만 중요한 선택에 기로에 놓일 땐 어김없이 말과 행동이 다른 것 같다고. 이 친구가 부모의 이중메시지(하나의 표현에 2가지 메시지가 담기는 것) 때문에 혼란스럽구나, 원하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자해를 하면서 시원한 느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4. 성적이 곤두박질친 것 역시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게 되면 부모님이 더욱 기대하게 되고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요구할 것 같은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하기 어려운 성적표를 보여드리면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꼴등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이루어 냈습니다.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망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 같았습니다.
5. 위에 내용은 제가 고등학생 때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침대에 누워 날이 밝아 오도록 늘 했던 생각은 '난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가'였습니다. 내 삶인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으로 우울했고, 내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세상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 표현해 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한 것이 자해였다는 걸 상담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 편이 없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았고 저를 이해해 주려 애써주셨던 좋은 어른들이 계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상담을 공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받았던 것처럼 좋은 어른이 되어 주고 싶은.
6. 상담실에서 저와 비슷한 이유로 자해하시는 분들을 뵙게 되면 내가 아픈 것처럼 마음이 더 쓰이기도 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고통이 아닌 내 고통처럼만 생각하게 되면 잘 돕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지레 내가 이랬으니 당신도 그러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을 만날 때 습관처럼 보는 것이 손과 팔입니다. 손톱을 물어뜯진 않았는지, 팔에 흉터는 없는지 살피게 됩니다. 오른손잡이인 친구들은 왼팔부터 살피게 되는데 익숙한 손에 칼을 들고 자해하기 때문입니다. 자해를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언제부터 했는지, 자해하기 전에는 어땠고, 자해하면서는 어땠는지, 하고 나서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었는지, 할 때마다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다른 마음이 들진 않았는지, 이런 마음을 나눌 사람은 있는지 등에 대해 좀 더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능숙하게(?) 해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민감하게 살필 수 있기도 한 것 같아 삶의 모든 경험들은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7. 자해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내 삶에서 ‘자율성’이 왜 중요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부모가 된 지금도 누군가에게 간섭받는 것이 불편하고 삶의 자율성을 잃지 않기 위해(이전처럼 자해를 하진 않지만) 간혹 발버둥 치는 모습을 발견할 때는 아직도 이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이 다양한 것처럼 자해를 하는 이유들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다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삶에 통제감을 갖기 위해 자해를 생각하시거나, 자해를 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삶을 살아내겠다는 증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