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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가 Oct 08. 2023

집 채 만한 파도는 볼 수 없어요

여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태풍. 

한반도 태풍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 서귀포다. 

작년 여름. 엄마와 나는 제주에서 처음 태풍을 경험했다.

육지에서 살다 제주로 내려온 이주민 선배들로부터 익히 들은 제주의 여름 나기 중에 솔깃했던 것 중 

한 가지가 태풍이 올 때 바닷가에 나가 집채만 한 파도를 직접 보는 거였다. 


태풍 ‘힌남노’가 일본을 거쳐 대한해협을 지날 때에도 슈퍼급 태풍으로 강한 바람과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기상예보와, 피해가 없도록 안전관리에 대비하라는 뉴스가 연일 방송 되었다.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경고 방송이었지만, 

베란다 샷시 사이에 박스를 끼워 넣고, 유리에 테이프를 붙이는 일 말고는 따로 대비할 것이 없었다. 


‘힌남노’가 한반도에 상륙하는 아침. 

엄마와 나는 집채 만한 파도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우비를 챙겨 입고 바닷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집 앞. ‘칼 호텔’ 옆의 검은여 해변.

해변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이미 통제가 되어 있어서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우고 바다를 보러 걸어 내려갔다. 

평소보다는 강한 바람에 파도가 크긴 했지만, 

집채라기보다는 중형차 한 대 정도의 크기라고 하는 게 적절했다. 


70세가 넘으신 엄마를 모시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던 나의 의지는 차를 법환리로 향하게 했다.      

법환 포구는 태풍이 상륙할 때면 방송국 차량들이 1순위로 들르는 태풍의 진로 포인트 였다. 

법환리로 향하는 길에 외돌개를 돌면서 보이는 바다의 파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침에 법환포구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부터 많은 차들로 복잡했다. 

큰 태풍이 온다는데 조심하라고 육지의 지인들이 며칠 전부터 안부 전화를 해오는 통에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받았던 엄마와 나는 바다로 향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면 욕한다며, 이 미친 짓을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던 말이 무색해질 만큼 

많은 사람들이 파도 구경을 하러 법환포구에 몰려 있었다. 

제주에 와서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고 서 있는 그렇게 많은 인파를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사람들 심리가 다 비슷한가 보다. 


멀찍이 차를 세우고 비옷을 단단히 여미고 나간 법환포구의 바다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먼바다에서부터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서히 커지는 파도가 방파제 근처에 올 때면 재난영화에 서나 볼 법한 크기의 파도로 굉음을 내며 방파제를 집어삼킬 듯 때렸다. 

태어나서 직접 본 파도 중 단연 가장 큰 파도였다. 

큰 파도가 부딪칠 때마다 구경 온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미친 짓을 같이 하러 나온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육지에서 내려온 이주민일 것이다. 

한 참을 비를 맞으며 ‘집 채 만한 파도’ 구경을 한 70대의 엄마와 40대의 철부지 모자는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파도가 집 채 만하기는 하지만 2층 짜리 큰 저택 정도는 아니고, 제주의 낮은 초가집 정도의 크기인걸 봐서는 ‘집 채 만한 파도’라는 표현은 제주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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