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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가 Oct 08. 2023

201번 버스 투어

휴일 아침. 

날씨가 허락되면 망설이지 않고 작은 배낭을 챙겨 버스를 타고 올레길 시작점으로 향한다. 

서귀포의 버스는 서울의 버스노선처럼 복잡하지 않지만, 배차 간격이나 구간이 촘촘하지 않다. 

제주도의 버스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빨간색의 공항리무진과 급행버스가 있고, 

파란색의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거나 시내의 권역을 잇는 간선버스, 

녹색의 권역 내의 중심지와 변두리를 잇는 지선버스가 있다. 

시내에서 저녁약속이 있거나 차를 두고 다닐 때는 지선버스를, 

올레길을 가거나 동쪽이나 서쪽으로 이동할 때는 간선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그 중 201번 버스는 서귀포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동쪽 해안선을 따라 일주동로를 타고 

제주 터미널까지 가는, 긴 구간의 간선버스다. 

제주도 동쪽 해안선 절반을 돌다 보니 운행시간만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른 아침 201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을 종종 본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뒷 좌석에, 연세가 많은 삼춘들은 앞쪽 좌석에 자연스럽게 나뉘어 앉는 건 기본이고

동네를 지날 때마다 타고 내리는 삼춘들은 서로가 아는 사이인 듯 

자연스레 제주 방언을 쓰며 안부를 물으신다. 


"어디 감수꽝? (어디 가시냐?)"

"밭에 약치러 감쪄. (밭에 약치러 간다.)"

"비가 하영 와서 미깡나무에 약을 자주 쳐줘야 될 꺼우다.

 (비가 많이 와서 귤나무에 약을 자주 쳐줘야 될거 같다.)"


운전기사 분도 오가는 삼춘들께 안부를 묻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타고 내릴 때 연신 인사를 하면서 내린다.      


그 날 아침도 수줍게 비치는 햇살에 잔잔한 바다를 보면서 오늘 걸을 올레 19코스를 상상해 보고 있었다. 

표선을 지나 신산리쯤 왔을 때 80대로 보이는 할망 한분이 버스에 올랐다. 

기사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어디 감수꽝? (어디 가십니까?)" 

"세화리 감쪄.(세화리 간다.)"

 

다음 정류장에서 비슷한 연배의 삼춘들이 버스에 오를 때

기사분은 혼자 계신 할망을 아는 분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시켰다. 

바쁜 운행시간에 쫓길 텐데도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수소문한 결과 다행히 아는 분이 계셨고

할망의 가족들에게 연락이 취해졌다. 사정은 이랬다. 

신산리에서 버스를 타신 할망은 윗동네인 난산리에 살고 치매를 앓고 계셨다. 

가족들이 모두 일을 나간 사이 집을 나와 길을 잃고 혼자 버스를 타신 거였다. 

기사님은 평소 버스를 자주 타지 않던 할망이 혼자 타신 게 이상해서 확인했던 것이었고 

다행히 동네 분들과 연락이 닿아서 가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쳤으면 자칫 행불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기사님의 세심한 배려에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종종 노인분들의 행방불명 재난문자가 날아오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날의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길 잃은 할망을 위해 운행시간이 다소 지연 됐지만, 20여 명의 승객들 누구도 기사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주도 원주민들이 퉁명스럽고, 드세다고들 말한다. 

그들만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괸당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맞는 말이다. 


2시간 넘게 201번 버스를 타고 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빨리빨리’, ‘나만 잘 살면 된다’ 생각했던 지난 날들이 부끄러웠다.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풍족하지 않아도 더불어 사는 게 어쩌면 더 행복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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