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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가 Oct 08. 2023

고기 잡는 해병

현장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잘 만나지 못했다. 

기준을 정확히 잡긴 어렵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연령대가 50대 이상인 곳이 많았다.


서귀포에 내려온 첫 해 겨울. 

일 년 중 가장 바쁜 귤 수확철이 시작되면서 사무실의 일감이 거짓말처럼 줄었다. 

사장님은 귤철이면 모두들 바빠 집수리나 건축할 여력이 없어서 매년 귤철에는 일을 많이 못한다고 했다.      

나는 긴 시간 쉴 수 없었기에 귤 선과장에 일을 하러 갔다. 

'선과장'이란 곳이 귤 수확철에는 일손이 항상 부족한 곳이어서 

학생, 주부, 외국인까지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장일을 시작한 지 3~4달 지났을 때라 몸 쓰는 일이 낯설진 않았다. 


맛있게 먹던 귤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할 때쯤 나는 귤박스를 쌓으며 K군을 처음 만났다.      

K군은 나보다 14살이 어린 조카 뻘의 멋진 청년이다. 

어부인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2학년 때 군산에서 서귀포로 왔다는 K군은 

대학까지 제주에서 나왔고, 직장도 제주에서 다닌 제주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작년까지 호텔 프런트에서 근무했던 K군은 

직장 3년차에 낮은 연봉과 평생직장으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호텔을 그만두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용돈이라도 벌 생각에 선과장에 나온 K군은 

2인 1조로 일하는 라인에서 나의 고마운 파트너로 한 달을 함께 일했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귤 상자를 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힘든 일을 

K군은 운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돈을 꼭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 K군이 선과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친 몸을 다잡고 그해 겨울 참 많은 땀을 흘렸다.      


외동아들인 K군은 해병대를 나왔다. 

전역한 지 꽤 지난 지금까지 해병대 정신이 빠지지 않은 건강한 녀석이다.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는 선장님이지만, 물고기가 불쌍해서 회는 못 먹겠다는 어이없는 해병.

힘든 선과장 일을 마치고, 매일 동네 헬스장에서 2시간씩 운동하는 몸짱이지만

집에서 벌레가 나오면 "엄마~" 하고 달려가 벌레를 잡아달라고 하는 평화주의자.  

바퀴벌레도 못 잡는 해병이 어디 있냐고 핀잔을 주면 "해병은 귀신만 잡지 말입니다!" 당당히 말하는 상남자. 

술을 마시지 않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나와 만나 삼겹살에 소주 대신 사이다를 마시는 멋진 녀석이다. 

공부는 일하면서 틈틈이 해도 충분하다던 K군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기 두달 전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가업을 잇기 위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육지의 항구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서귀포항에 있는 선원들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나이가 있으신 선장을 제외하곤 젊은 어부들 중에 한국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선장인 K군의 아버지도 어렵게 외국인 선원을 데려와도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는 외국인들을 

관리하기 힘들어 결국 아들인 K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 또한 K군에게 바다에서의 일이 힘들긴 하겠지만

부동산일보다는 배를 타는 것이 훨씬 비전이 있을 거라고 응원해 주었고

K군도 50년 경력의 아버지의 노하우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큰 고민 없이 배를 탔다.

 

처음 2~3달간은 멀미를 심하게 해서 배를 못 탈것 같다고 힘들어했지만

잘 극복하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버지를 따라 매일 밤바다로 나간다. 

가끔 '잡어'라고 선물로 가져다주는 생선이 너무 많아서 종종 이웃의 지인들과 나누어 먹는다. 

      

새벽 3시경 일을 나가면 다음날 오후 2시쯤 들어오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조업 현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유튜브 채널도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도 멋진 남자지만, 아직 솔로인 K군이 매일 물고기만 보다가 나처럼 될까 걱정이 들긴 한다.


"K야, 쉬는 날 형이랑 만나 노는 것도 좋지만

 더 늦기 전에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길 형은 진심으로 바란다. 올해는 꼭 좋은 사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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