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Woman with a Parasol)
02. 없는 말들
그날 저녁 주원이 생일 선물이라고 사온 것은 1500피스짜리 퍼즐이었다. 추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집에 온 주원이 내민 퍼즐박스를 양손으로 쥔 채, 승연은 앞에 그려져 있는 모네의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아랫부분의 들꽃그림을 엄지로 쓸어보았다. 리시안셔스로 풍성히 채운 꽃다발을 받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왔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번엔 퍼즐인걸까. 승연은 옆에서 모네에 대해 무어라 떠들어대는 주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부엌으로 갔다.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동네의 작은 케이크샵에서 직접 주문한 케이크를 꺼내 2인용 테이블에 놓았다. 라벤더 색의 크림이 뒤덮이고 하얀 크림으로 HAPPY BIRTHDAY라고 적힌, 승연이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바나나 맛이 나는 케이크.
오빠, 커피는?
응? 커피라니?
내가 사와 달라고 메시지 보냈잖아.
아, 핸드폰을 안 봐서. 몰랐어.
승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끓이고 차를 내려서 두 사람은 함께 케이크를 먹었다. 주원이 어쩐지 머쓱한 얼굴로 초에 불이라도 붙이자고 했지만, 승연은 초를 받아오지 않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케이크 샵에서 받아온 초가 있었지만, 승연은 초를 싱크대위의 후추통 뒤에 밀어두었고, 주원은 그것을 까맣게 모를 것이었다. 승연은 케이크를 크게 조각내 한 입 먹었다. 달콤한 초콜릿과 바나나 향이 기분 좋게 입속을 채웠다. 승연이 작은 케이크의 절반을 먹어치우는 동안 주원은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주원이 단 것을 싫어한다는 걸. 승연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붉은 해가 어쩐지 처량하게 구름 아래로 조금씩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이크를 먹고 난 뒤, 주원은 작은 거실에 앉아 퍼즐뚜껑을 열었다. 승연은 차를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원이 일본여행을 갔을 때 마셨던 차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주원의 박학다식함에 반해 언제까지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었다. 그는 파스칼 키냐르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하나씩 읽어주었고, 최정례와 이성복의 시를 읊어주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사진을 보여주며 건물과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었고 언젠가 함께 피렌체를 걷자는 약속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 말들은 마치 물속에서 뱉은 듯 이제는 흔적 없이 사라진 채였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서 가끔씩 먼저 그의 귓가에 이것저것을 속삭여 보았지만….
주원은 퍼즐을 꺼내놓고 승연을 불러 앉힌 뒤, 퍼즐의 테두리 조각들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승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양산을 든 여자의 얼굴이었다.
승연아. 테두리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조각들을 맞춰나가야지.
주원의 말들이 승연의 귓가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승연은 여자의 얼굴을 내려놓고, 얼굴 주변 조각을 찾아 맞춰나갔다.
그거 알아? 이 그림은 모네가 자기 부인을 부르고, 부인이 뒤돌아보았을 때의 모습을 그린거래. 그래서 그런지 여자의 눈빛에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아?
아니. 난 잘 모르겠….
승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원이 말을 잘랐다.
옆의 귀여운 남자애는 아들이래.
승연은 주원에게 이렇다 할 대꾸도 하지 않고 퍼즐 조각을 뒤졌다. 마침내 여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퍼 보이는데.
승연이 중얼거렸다. 주원은 무슨 말이냐며 물었지만, 승연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이 애는 명예만 남고 돈은 없는 귀족 집 딸이야. 이제 결혼을 할 나이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니 뭐니 하는 자신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아버지가 잡아온 혼처와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아니, 이 여자는 모네의 아내라니까…
승연은 고개를 저었다.
새 옷, 새 양산. 새 가구, 새 침구. 집안에는 이제 먹을 것이 넘쳐나고, 아버지는 귀한 담배도 마음껏 피울 수 있지. 어머니는 좋은 천을 떼와 동생들의 옷을 만들게 하고 여자의 동생들은 진귀한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음에 신이 나 있어. 아무것도 모르고.
뭘 모른다는 거야?
언니, 누나의 마음.
넌 무슨 말도 안 되는…
승연은 완성된 여자의 얼굴 조각을 한편으로 밀고 다른 조각들을 찾아 손에 쥐었다. 잠깐 거북한 침묵이 흘렀지만, 승연의 표정은 평온했다. 전례 없던 단호한 손짓으로 퍼즐을 한편으로 밀고 주우며 그녀는 양산을 든 여인 곁의 아이의 모습을 차근차근 완성시켰다.
누군가 양산을 쓰고 산책하는 여자를 불러. 아마도 여동생일 거야. 고급 모슬린 옷을 입고 숄을 걸친 여자가 집 쪽을 향해서 뒤를 돌아봐. 여동생이 함께 산책하자고 달려오고 있어. 하지만 아름다운 구름이나 태양 빛을 받아 색채를 뽐내는 들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어. 아니. 없다기 보다는, 슬프고, 냉랭하고, 허무해. 집 앞에는 마차와 미래의 남편과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든. 그녀는 이 모든 게 다 싫어. 자신이 원하는 것 따위는 아무도 개의치 않는 자신의 가족도 싫은 거야. 그녀가 몹시 예뻐한 남동생의 눈빛을 봐. 이 아이마저 아무것도 몰라. 누나가 어떤 처지인지, 어떤 마음인지. 그저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뛰어다녀 혈색 좋은 얼굴로 멍하니 서서 작은 누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눈앞의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거든.
주원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승연을 바라보았다.
승연이 너, 오늘따라 너답지 않은 소릴 하네?
이런 이야기 자주 했었는데? 오빠가 몰랐을 뿐이지.
그랬나?
주원은 배시시 웃고서 승연의 손을 잡았지만, 승연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 다시 퍼즐 조각을 맞추는데 몰두했다.
우리 이거 다 맞추면 액자에 넣어서 거실에 걸어두자. 액자는 내가 사줄게. 두 번째 생일 선물이야.
안 그래도 돼.
왜? 걸어놓으면 예쁘잖아. 그리고 남자친구가 사준 건데.
주원은 웃으면서 퍼즐 테두리를 맞춰 나갔다. 승연은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주원이 고개를 들어 승연과 눈을 마주쳤고, 그는 다시 해맑게 웃으며 모네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승연은 듣지 않았다. 모네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생일 선물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생일선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보일러를 세게 틀어 붉어진 주원의 볼과 해맑은 두 눈을 보며 승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나 오늘 밤새서라도 이 퍼즐 완성 시킬 거야.
액자를 주문하며 주원이 중얼거렸다. 퍼즐은 이제 고작 1/5가 완성되어 있었다. 승연은 퍼즐을 보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저 퍼즐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이 된다 할지라도 승연의 집에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뒤를 도는 여자의 얼굴과 남자아이의 모르는 눈빛에서 승연은 들었던 말들 보다 듣지 못한, 그래서 없는, 그런 말들을 떠올릴 것이고 그건 얼마동안 승연을 슬프게 만들 것이었으니까. 사실 저 퍼즐은 완성되지 못할 운명이라는 걸 승연은 곧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원도 이제 그 운명만은 알게 될 것이었다. 승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