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고야 The Dog
05. 모래의 여자(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인용)
언니에게 딱인 남자가 있어.
K가 말했을 때, 나는 주저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연애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취향을 속속들이 아는 K가 딱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처음인지라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이냐 물어도 K는 그를 직접 만나서 알아가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결국 그를 만나기로 했다.
녹사평 2번 출구를 힘겹게 올라가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강렬한 햇살이 나를 반겼다. 눈을 반쯤은 감은 채, 2번 출구 근처에 있다는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그 남자인 듯한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멸망이다.
갓 자다가 일어나 나온듯한 부스스한 머리, 긴 목, 또렷한 목울대, 긴 팔다리와 마른 몸, 그 무엇보다 선한 인상의 큰 눈망울에서 풍기는 소년스러운 분위기. 내가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난한 지난 연애들의 통계적 결과는 내게 비상벨을 울리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내가 너무나 빠져들 만한 사람이어서였을까? 나는 이미 그 사람이라면 지옥불에라도 들어가겠다는 심정이 되어 있었고 그건 그야말로 멸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알고 보니 대학 동문인데다가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던 우리는 첫날부터 새벽 한시까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고,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맛있는 맥줏집을 찾아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베이스 소리 같아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은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궁금하댔더니 조금 부끄러워하던 그는 헤어지기 전에 자신의 포트폴리오 주소를 내게 알려주었다. 그는 고흐가 사용할 법한 아름다운 컬러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어둠과 기괴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꽤나 근사한 그림들이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그의 머릿속이 더 궁금해졌다. 그의 그림들이 좋다고 말하자 그는 웃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그 주변으로 잔주름이 졌다. 웃는 것 마저 예뻤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문자메시지는 여전히 다정하고 전화 통화할 때의 목소리 역시 너무나 다정했지만, 10분 간격으로 오던 메시지는 점점 긴 시간을 두고 오기 시작했다. 30분, 1시간, 3시간에서 4시간까지. 내가 싫어졌나 의구심이 들면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는 어떻게든 저녁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거나 전화를 해 애정 어린 말들을 늘어놓았다. 편해서 그런지 자신의 본모습이 나온다는 말을.
아, 이렇게 애를 태우기까지 하다니, 나는 어쩐지 그라는 끝없는 개미지옥에 발을 담근 기분이 들었다. 발밑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고 또 한 번 당분간의 연애로 마음이 처참해질 것임을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지만, 이미 나는 그 시그널을 애써 무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는 답변에 마음을 접으려고 해보았지만, 막 물에서 나온 발에 달라붙는 모래들처럼 그의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못 본 지 겨우 이틀이건만, 나는 그가 그리웠다.
나흘째 되던 날, 그의 연락이 왔다. 새 작품을 하느라 바빴다고 했다. 중간에 밥은 먹지 않나? 화장실도 안가나? 그 사이에 연락해 줄 수는 없었나? 모든 것은 핑계라고 머리가 말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온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재미있고 나를 향한 애정을 보여주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렇게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지 말고 말이라도 해달라는 내 말에 그는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안 그래도 할 말이 있다며 이야기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꼭 만나야 한다는 말에 나는 차마 일이 있다고 하지 못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저녁 일을 취소하며 나는 괜히 허공에서 발을 털어보았다.
며칠을 만나며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 나와 제대로 만나고 싶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뻤지만, 그 말에는 조건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작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작업에 들어가면 연락이 잘 안될 거고요. 그때마다 이렇게 내게 연락을 강요하고 조른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게 힘이 든다면 여기서 그만둬요 우리.
그 조건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자명했지만, 내겐 그것을 거부할 의사가 없었다. 마치 달리는 차의 꽁무니를 뒤쫓는 동네의 개들처럼 나 역시 그의 뒤를 본능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모래 늪처럼 나를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라는 모래 더미를 본능적인 공포와 눈 먼 환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조건문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