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Untitled
03. 사막에서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듬성듬성 땅 위로 솟아오른 작은 덤불과 선인장 이외에 살아 있는 것의 흔적 역시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바짝 마른 노란색의 땅만이 눈앞을 맴돌았다. K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막의 최대한 먼 곳을 응시하려 시도했다.
“지금은 좀 그래도 곧 바위들이 있는 풍경이 나오면 볼만 할 거야.”
“지금도 나쁘지는 않아. 살면서 이런 건조한 풍경을 언제 또 보겠어.”
P의 말에 K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붉은 바위가 근사하게 솟아 있는 사막의 모습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자동차 창에 기대 영원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사막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것은 생각과 상상, 그리고 잠뿐이었다. K가 창밖에 펼쳐진 땅과 지평선, 태양을 보며 꾸벅꾸벅 졸던 순간, 그토록 죽이 잘 맞던 P와 싸웠던 일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무슨 일로 싸웠더라? 아, P가 나를 빼고 다른 친구들과 작업을 했었지. 함께 하자고 내게 먼저 묻지 않아서 매우 상처받았었어. K는 꾸벅꾸벅 졸며 그 당시를 상기했다. 그 때, P는 온 몸에 나무 조각과 톱밥을 묻힌 채 피곤한 얼굴로 작업실 한 구석에 서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도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이번 주제와 너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있었다고. P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울먹이며 서운함을 말하는 K자신의 목소리가 작열하는 태양빛 사이로 들려오는 듯 했다. K는 몇 번의 날카로운 말이 오간 뒤에 상처받았던, 과거 자신의 마음을 또렷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미안해. P가 말했다. 거듭된 P의 사과로 둘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 그 말 한마디에 K의 서운함이 내려앉았고, 두 사람은 언제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았냐는 듯 예전처럼 다정히 지냈다. 그 이후로도 감정이 격해지거나 서운함이 있을 때면 P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K에게 먼저 사과를 건네곤 했었다.
그때였다. 다급한 P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K는 잠에서 깨 비몽사몽한 얼굴로 P를 쳐다보았다.
“일어나봐. 뒤에 저 여자 보여? 이 사막 한가운데서 쟤가 또 언제 차를 만날 수 있겠어. 그리고 여자잖아. 우리라면 안심하고 탈 수 있기도 할 거고. 태워도 되지?”
K가 기어가듯 최대한 느리게 굴러가던 차의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고개를 뺀 뒤, 뒤를 보자 핫팬츠에 슬리브리스 티셔츠를 걸치고 커다란 백팩을 멘 채 손을 흔드는 한 백인 여자가 보였다. K는 조금 겁이 났다. 하지만 P의 표정이 그녀를 돕자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기에 K는 결국 차를 세우는 데 동의했다.
차에 올라탄 J는 갈색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나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J의 느릿한 말투와 느긋한 태도에 K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J는 고맙다는 말을 두어 번 한 뒤, 두 사람에게 바로 다음에 머물 도시는 어디냐고 물어왔다.
“솔트레이크 시티로 가고 있어. 출발?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했지.”
“나도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내려도 될까?”
“물론이지.”
영어를 잘하는 P는 운전을 하면서도 J와 쫑알쫑알 쉼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K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대화로 짐작컨대 P와 J는 제법 죽이 잘 맞는 듯 했다.
“J는 뉴욕에서 왔대. 그리고 사진작가래. 지금은 휴식 차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들었어.”
“아. 그랬어?”
K는 새롭게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 신이 난 것 같은 P가 어쩐지 얄미웠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샛노란 태양빛을 받으며 잠을 청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K의 귀에는 J와 P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번은 시인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어. 작업이 무난히 진행되나 싶었는데, 조금 트러블이 있었지. 같이 일 하다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잖아 그런 건.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나보더라고.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연락을 끊어버리고 두문불출 하더라. 자기가 은자라도 되는 듯이.”
J의 느릿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K자신도 놀랄 만큼 또렷하게 귓바퀴를 맴돌았다. 영어가 이렇게 잘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맞아. 너무 감정적인 사람들은…. 같이 작업하기 너무 불편해. 난 우는 사람이 싫어.”
잠이 싹 달아나는 소리였다.
“우는 사람 최악이지. 너무 감정적인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이야기해도 감정이 사라지기 전까지 잘 듣지 않으려고 해.”
“동의해. 이유를 알려주고 설명을 해도 감정에 젖어 듣질 않으니 트러블만 지속되고….”
“넌 그럴 때 어떻게 해?”
“나? 그냥 사과해. 진심 아닌 사과.”
까르르 웃는 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데없이 힘 뺄 필요 뭐 있어. 난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한텐 두 번 설명 안 해.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야.”
“좋네.”
그 뒤로 J와 P가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K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눈을 꼭 감고, 노랗게 말라버린 사막과 그 위를 비추는 태양이 감긴 눈 위로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한 채로 P의 말 속에서 멈춰버렸다.
“아까와는 풍경이 다른 걸? 붉은 바위들이 근사하네.”
“잠깐 차 세워줄 수 있어? 내려서 사진이라도 찍게.”
“좋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드는 P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K는 눈을 뜰 수 없었다. P는 몇 번 K를 깨우려 시도하다가 차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K는 실눈을 뜨고 붉은 바위 맞은편으로 지는 석양을 보았다.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한 바위산들의 얼굴위로 태양이 빛났고, 그 덕에 바위산 뒤편의 또 다른 산위로 바위산들의 그림자가 졌다. 붉고 검은 대지와 푸른색과 연보랏빛의 하늘은 낯설기에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K는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P가 그녀를 깨운 마음은 진심이었을까? 그녀는 마음의 일부를 샛노랗게 말라버린 네바다의 사막에 떨어트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두 번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