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모토 히로시 북대서양, 모허절벽
07. 세상의 끝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이차선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고 나오는 말했다. 살던 도시의 최후를 기억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오는 고개를 저었고 조금 울었다. 끝의 사람들은 나오를 가엾게 여겼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끝의 사람들에게 비극이란 손등에 하나쯤 있는 흉터와도 같았기 때문에, 어쭙잖은 위로 따위로 남의 마음에 치는 파도를 잠잠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나오는 절벽에 있는 나무 집을 배정받아 그리로 향했다. 나오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끔 나오가 절벽가에 앉아 낚시하는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날이 안개로 뒤덮인 끝의 마을에서는 그것이 진실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나오는 끝나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기를 원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나오를 굳이 끌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구주는 해변가의 첫 번째 집에 살던 일가족이 안개에 삼켜진 다음 날 끝의 마을에 나타났다. 안개에 삼켜진 사람이 살던 집은 언제나 파도에 부서졌고 갑자기 다시 생겨나곤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 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구주를 데리고 나오의 집으로 갔다. 그곳 외엔 비는 장소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허리까지 머리를 기른 나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가의 두 번째 집에 사는 남자가 사정을 설명하자, 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벽의 나무집은 그렇게 나오와 구주의 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구주는 다정한 소년이었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안개에 삼켜질지 모르는 끝의 마을에서도 타인에게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나눠주곤 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기도 했다. 종말을 코앞에 두고 친절을 베풀어봤자 남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누군가는 구주의 뒤에 침을 뱉기도 했다. 하지만 구주는 개의치 않고 사람들의 집을 오가며 웃음을 나누었다.
구주가 오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안개는 해변가 둘째 줄의 세 번째 집 사람들을 집어 삼켰다. 안개가 다녀간 뒤, 구주를 제외한 사람들은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오가 자신과 있는 것이 불편할까 봐 구주는 매일같이 밖을 쏘다녔다. 안개가 다녀간 다음날에도 구주는 장화를 신고 낚싯대를 챙긴 뒤, 대문 앞에 섰다.
다녀올게.
…위험하다던데.
구주는 고개를 돌렸다. 이 집에 온 뒤 처음으로 나오가 구주에게 대답을 한 것이다.
안개가 다녀간 다음 날은 위험하대.
나오는 침대 위에 쪼그리고 앉아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주는 미소 지으며 낚싯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오와 함께 구운 생선을 먹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질문과 짧은 대답만이 오고 간 대화였지만.
그날을 시작으로 구주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날들이 늘어갔다. 사람들은 구주가 괜찮은 지 절벽의 나무집을 기웃거리다가 구주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는 나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돌아서곤 했다. 가끔 낚시를 하거나 안개가 덮치고 간 흔적을 보러 구주가 나올 때면, 구주의 손을 잡고 그 옆에 바짝 붙어 숨듯이 서 있는 나오를 볼 수 있었다.
안개가 온 마을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종말은 현실이 되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나갔고 마을에는 새로운 집들이 생겨났다. 그 집을 채우는 사람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바깥 도시들의 멸망도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는 거라고 나오는 웅얼거리곤 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한 침대를 썼다. 구주의 다정함은 불면에 시달리던 나오를 잠들게 만드는 유일한 수면제였다. 구주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나오는 구주의 딱딱한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었다. 그때만큼은 안개와 종말에 대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안개에 집어삼켜졌지만, 두 사람의 오두막은 꽤 오랜 시간을 홀로 버텼다. 두 사람은 낚시를 하고, 조개를 캐며 하루하루를 서로의 목소리와 그것이 읊어주는 이야기로 견뎠다. 구주는 물고기를 낚는 동안 나오에게 자신이 수집했었던 영화의 포스터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구주가 말이 없는 동안에는 나오가 나지막이 외할머니가 자신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자신의 안에 새겨놓았다.
마침내 세상의 마지막 안개가 구주와 나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깨어 있었다. 나오와 구주는 입구에 쪼그려 앉아 서서히, 느리게 그리고 고요히 밀려오는 안개를 보며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에 입을 연 것은 나오였다. 나오는 조곤조곤 자신이 살아온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구주에게 떼어주었고, 구주는 나오의 손을 꼭 쥐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이 이야기들은 기억하고 싶어.
나오는 구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개가 그들의 발끝까지 밀려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주는 나오가 알려준 노래를 읊조렸다. 몸의 일부가 사라지자 남은 몸의 감각들이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감각이 발끝을 갉아먹으며 몸 위를 타고 올랐다. 나오는 구주를 바라보았다. 구주의 목까지 차오른 안개는 구주의 목소리를 잡아먹었다. 나오는 구주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뻐끔, 뻐끔, 뻐끔.
소리가 없이도 나오의 말은 구주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보는 데에도 공을 들일 수 있다는 듯, 구주는 나오의 입을 정성껏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처럼.
구주는 나오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