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를 위한 습작 V
08. 둘이 사는 마을
녹음이 짙게 드리워진 산맥 아래를 헤맨 지 사흘이 지났지만,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개의 재앙이 지구를 덮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기는 너무나 어려웠고 먹고 살 방도를 찾는 것도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맨 얼굴로 태양 아래를 얼마나 쏘다녔는지 남자의 얼굴은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 부는 바람을 겨우 맞으며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마실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그의 눈에 언뜻 저 멀리의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사람이었다.
남자는 경사진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안개의 재앙 전에는 사람과의 만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평소에 끔찍하게 생각하던 단어 ‘사람 냄새’가 너무나 그리웠다. 사람 냄새라 하면 땀 냄새와 체취 따위가 떠올라 괜히 얼굴을 찌푸리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 체취마저도 그리웠다. 한 달이 다 되도록 사람은 구경도 못했으니까. 한 달 전 이 산맥 근방에 남자들이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죽은 할아버지가 그가 본 사람의 전부였다. 그는 밭을 일구는 듯 보이는 두 사람(여자였다)이 가까워지며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고 흔들며 그들에게로 갔다. 달리기는 멈췄지만, 여전히 두 다리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달려오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던 두 여자 중 한 명이 말했다. 긴 머리를 질끈 묶어 포니 테일을 한 그녀는 소매와 길이가 짧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 팔과 배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나머지 한 여자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소매와 길이가 짧은 티셔츠를 입고 핫 팬츠를 입은 채 호미를 쥐고 있었다. 그는 순간 여자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두 사람 모두 건강해 보였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어 매우 밝아 보였다.
“와.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그는 마치 유일하게 아는 단어를 반복하는 한 마리 앵무새처럼 맥락도 없이 감탄사만 내뱉으며 두 여자를 만난 감격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을 만난 게 오랜만이신가 봐요?”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람과 먹을 것을 찾아 헤맨 자신의 여정을 구구절절 읊으며 제 고난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물었다.
“두 분은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두 분만 계신가요?”
남자의 질문에 두 여자는 잠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포니테일을 한 여자가 갑자기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배고프실 텐데. 뭐라도 좀 드시죠.”
여자들은 남자를 데리고 바로 근처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며 감격했다. 정말 사람 냄새가 나는 집이었으니까. 커다란 감나무가 있고 한구석에는 닭장이 있는 마당, 햇볕에 널어놓은 고추들, 그를 보고 경계하며 짖어대는 개까지 모두 정겨운 풍경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마당을 가로지르며 널려 있는 속옷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속옷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일을 돕는다고 하고 함께 머무르게 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지도 모른다. 남자도 없이 이 험한 세상에서 여자 둘만이 있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일도 많고 나는 여러모로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두 여자는 당연히 자신을 머무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먼저 먹을 것을 주겠다며 집 안으로 부른 게 아니겠는가. 곧 여자들이 차려준 밥상에는 각종 나물과 구운 계란, 김치찌개와 감자조림, 그리고 생선구이가 올라와 있었다. 진수성찬을 보자 그의 자신만만한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근처에 바다가 있나요?”
“네. 조금 걸어 나가면 바닷가가 나와요.”
허겁지겁 밥을 먹은 남자의 질문에 여자가 대답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시종 미소가 띄워져 있었기에 남자는 더 기분이 좋았다. 어느 쪽이 맘에 드는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두 여자는 누가 그에게 더 친절하게 구는지 대결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는 시종일관 두 여자에게 농담을 건네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들을 늘어놓았다.
“제가 낚시를 좀 하는데요. 맛있는 것도 얻어먹었겠다 고기 좀 잡아다 드릴까요?”
남자의 말에 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그녀들의 거절이 의례적이라 생각하고 도와줄 것이 없는지, 정말 낚시해 드릴 필요가 없는지 재차 물었으나 그녀들은 웃으며 모든 호의를 거절했다. 어색한 침묵이 밥상 위를 맴돌았다. 두 여자는 그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만 짧게 할 뿐이었다. 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뜻과 묘하게 엇나가는 상황을 수습하려 그는 애를 썼다. 자신의, 남성의 필요를 계속해서 언급해 보고 두 사람의 미모에 대해 농담을 던졌지만, 두 사람은 웃기만 할 뿐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오거나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둘 중 한 사람과 어쩌면 연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남자는 당황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그의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신발을 신었다.
“이걸 쓰고 가세요.”
여자가 내민 것은 노란색 고무 모자였다. 그녀는 집에 모자가 이것뿐이라며 더위를 가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노란 모자를 쓴 남자의 얼굴은 그늘이 져 더욱 검게 보였다. 그는 떠나려는 순간까지도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의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를 본 지도 너무 오래였으니까. 남자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자신의 행선지를 밝혔다. 근방 어딘가에 마을이 있다고 몇몇 남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리로 갈 거라고 말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때, 처음으로 두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바스락.
인기척에 남자는 뒤로 홱 돌았다. 하지만 뒤에는 그가 남김없이 먹어치운 밥상만이 남아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돌아섰다.
“역시, 오늘은 주무시고 가는 게 좋겠네요.”
“그러게요. 쉬시고 내일 출발하시죠.”
여자들은 갑자기 그에게 하룻밤 투숙을 권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라 생각하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마당을 둘러보니 한곳에 붉은색으로 칠해진 도끼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나무를 해주겠노라며 가방을 벗었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시원한 평상에 앉혔다. 나무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곧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식혜를 내왔다. 남자는 식혜를 쭉 들이켰다. 곧 그는 한낮의 더위에 몽롱함을 느끼며 평상 위에 옆으로 드러누웠다. 그러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쇠스랑, 삽, 호미, 곡괭이, 도끼가 눈에 띄었다.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여기 온 남자가 저뿐인가요?”
“아뇨. 다른 남자들도 있었지요.”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요?”
“곧 만나게 되실 거예요.”
남자는 역시 마을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과 이 여자들을 두고 다퉈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내일 여자들을 구워삶으면 될 것이라 여기며 조급해진 마음을 이내 다스렸다.
그리고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세 번째 다리와 도끼는 보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