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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하루들 그리고 12월

by kirin Dec 10. 2024

12월의 연말을 이렇게 곤혹스럽게 보낼 줄 몰랐다. 새벽부터 오던 눈은 오후까지 오다 그치더니 저녁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종일 할 일들을 하고 약속이 있어 밖으로 나갔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영주권을 받으면 대부분이 다른 도시로 떠난다. 어디서든 헤어짐은 있지만 늘 나는 남는 사람이었다.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늘 남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곳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왔지만 남을 곳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한 탄식은 최근 나를 가장 괴롭히는 감정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나 잠시 들른 지인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지난한 일들을 토로해야 하는 마음은 가벼울 리 없었다. 눈과 비가 섞여 내렸던 것인지 길에 눈이 섞인 물웅덩이들이 제법 생겼다. 즐거울 리 없는 마음으로 지인을 마주하자 인사가 끝나기도 무섭게 울음이 터졌다. 아직도 많이 서러웠나 보다. 얼른 눈물을 닦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유리창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모임을 하는 사람들도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제법 많아 보였다.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인의 안부를 물은 건 내 이야기를 한참하고 나서였다. 좋지 않은 일들을 전하고 상대의 안부를 묻는 일은 대화의 예의 같은 느낌이다. 종종 사람들을 다시 돌려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매번 그 사람들에게 나는 설명한다. 내가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나는 더 이상 그 말에 안된다는 강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탈출하지 못한 것 같은 이상한 감정으로 매일을 보낸 나는 지나간 일을 곱씹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지난 시간을 들추어봤자 나 혹은 타인을 탓하게 될 뿐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이따금씩 창밖을 보았다. 눈이 내리고 몇몇 사람들이 길을 오간다.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누군가가 눈을 맞으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퇴근을 하는 길일까 이벤트를 위해 어딘가로 가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떠한 감흥도 없이 들뜬 사람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자꾸만 마른세수를 했다.


얼마 전 이옥섭 감독님이 나오는 팟캐스트를 들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 이야기가 나왔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근처에 넘어 돈다는 말을 하면서 내 곁에 있다가 떠난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종종 나에게 혼자 사는 게 속편 하다면서 능력만 있으면 혼자 살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어쨌든 혼자 살 생각이니 잘 좀 자리 잡고 살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 망설여지는 어렵고도 무서운 글자였다. 내가 그런 겁쟁이라서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엉망진창이었던 지난 시간들을 울면서 주워 모으다 걷고 또 걷다 윤슬이 가득한 물 위를 하염없이 바라봤던 화창했던 날을 기억한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들춰보다가 부쩍 많아진 흰머리가 보였다. 늘 엄마의 새치를 염색해 주면서 겉으로 보이지 않던 흰머리가 들추면 곧잘 보이곤 했다. 족집게를 가져다 몇 번을 검은 머리도 뽑아가며 희머리 몇 가닥을 뽑았다. 그래도 자꾸만 어딘가에 숨어있던 흰머리가 보였다. 엄마의 얇고 가는 새치가 생각났다. 염색을 자꾸 하다 보니 머리카락은 더 얇아지고 숱도 적어졌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머리숱이 많은 게 복이라고 했었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좋은 게 없다면서 말이다. 머릿속을 몇 번 들추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또 날 흰머리였다. 매일이 고단했을 엄마도 나처럼 거울 앞에서 머릿속을 들추면서 고단하다 힘들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도 엄마를 닮아 어느새 흰머리가 올라오는 걸까.


눈보라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 같은 일들이 나를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나도 들뜬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여태 잘 넘겨왔으니 그 힘으로 잘 버텨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남았다. 쌓은 눈 위로 또 금세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집 근처 길가 묘지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앉았다. 왜 사람들은 묘지를 싫어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게 떠오른다. 고요한 묘지는 계절을 가만히 품고 있는 거 같았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의 무덤과 묘비들 사이를 걸을 때 유난히도 빛이 밝은 그 길이 좋기도 했다. 조금씩이라도 좋아했던 것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소식이 들리길 바라는 늦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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