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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Dec 29. 2021

걸어두면 새어 나오지 않나요

당신과 이별을 하고 돌아오던 날 나는 작년 겨울에 당신이 주셨던, 장롱에 걸려있는 목도리를 매만지며 펑펑 울었습니다. 장롱 아래에는 당신이 만들어 주셨던 쿠키 상자도 놓여있었고요. 혼자 몰래 감춰두고 아껴 먹으려 했던 과자인데 하나 더 뜯어보지도 못하고 이제는 파랗고 하얀 곰팡이가 펴서 모두 버려야 되게 생겼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그 쿠키 상자에 같이 보냈던 쪽지의 내용도 기억해요.


‘모양은 엉망이지만 맛은 있어요…’


나는 쪽지 너머로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멋대로 상상하고, 또 멋대로 사랑해 버려서 쿠키가 전부 으깨졌어도, 반죽이 덜 익었어도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맛있게 먹게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목이 메어서 한 입도 못 먹게 되었지만요. 그래도 누가 이별을 되돌릴 기회를 준다고 하면 저는 이 하얗고 파랗게 곰팡이가 펴 있는 쿠키도 싹 다 먹을 수가 있지만요.

  

우리가 헤어지면서 당신이 ‘우리 기억들을 이제 잠가 놓는 게 좋겠다’고 얘기를 했을 때 마음이 철렁하고 나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참 속 편한 표현 아닙니까 무언 갈 잠가 둔다는 것은요. 딸깍- 하고 걸쇠를 걸어두면 안에 있는 건 안에 있는 것 대로, 바깥쪽에 있는 건 바깥쪽에 있는 것 대로 서로 침략하거나 침범당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요. 그 표현이 정말 얄미울 정도로 실속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안 그러면 안 돼요?’ 라거나 ‘그게 마음처럼 돼요?’라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습니다. 아니, 저도 입 안에다 잠가뒀어요.

  

저는 종종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느껴본 적은 있지만, 파헤쳐 보려고 한 적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글쎄, 사랑이 뭔 데?' 라며 겉멋이 든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데 진짜 사랑이 뭘까?' 과몰입하며 괜히 헛헛한 마음이 들던 날도 있고요. 그 마음이 대체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떤 모습이어야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때때로 슬픈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볼 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게 꼭 당신이 힘들어하거나 안쓰러워 보일 때만은 아니었습니다. 귀엽거나, 호기심 많아 보이거나, 너스레를 떤다거나, 소심하게 허풍을 떠는 모습 같은 걸 볼 때에도 좋아하는 마음과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당신은 혹여, 나를 보며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가 죽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울어주는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고 믿기로 했고요.

  

한 번은 당신과 마트에 갔을 때 5 봉지에 5천 원 행사를 하는 과자 코너에서 홀린 듯 과자를 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퍽 귀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패딩조끼를 빌려 입고 거울에 요리조리 매무새를 비춰보며 경찰 같다고 말하는 모습도 그랬고요. 같이 한강에 갔을 때 포도 맛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어보곤 이건 당신의 인생 아이스크림이라며 감동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아! 마라탕은 이제 다신 먹지 않을 거라고 선언해 놓고 또 몰래 마라탕을 시켜 먹고 머쓱해하는 모습을 볼 때도 그랬어요. 이제 저는 포도 맛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보아도, 패딩 조끼를 입다가도, 과자 할인행사 같은 것을 보아도 가끔 퍽 울음이 날 겁니다. 잠금장치를 걸어 두어도 아마 새어 나올 겁니다. 저는 이걸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했고요.

  

스타벅스에 갔는데 크리스마스 즈음이라 그런지 텀블러를 예쁘게 포장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어요. 예전에 당신에게 스타벅스 텀블러를 선물했는데 ‘이건 얼음이 아주 오랫동안 녹지 않아요’라고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또 무심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런 걸 하나하나 다 잠가두려면 저는 아주 많은 자물쇠와, 또 그것을 일일이 걸어둘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했고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눈이 왔습니다. 저는 '서울에는 눈이 와요'라고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다, 몇 번 머뭇거리다가 차마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도로 내려놓았습니다. 흘끗 창밖을 보니 펄펄 내리기만 하던 눈이 어느새 조금씩 쌓였습니다. 지붕에도 담벼락에도 사람들 오가는 길 위에도요. 저는 그 눈이 참 당신처럼 내려앉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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