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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형태의 폭력

by A록


그 사람은 성당을 미친 듯이 다녔다. 그 사람이 새벽 미사, 오전 미사, 저녁 미사까지 보느라 온 종일 집과 성당을 바쁘게 오가는 동안 오빠와 나는 음식 재료를 먹으면서 살았다. 순두부 봉지를 잘라서 그대로 떠먹고, 미숫가루를 설탕을 섞어 퍼먹었다. 도시락은 늘 부실해서 김치 반찬에 김치찌개를 싸간 적도 있었는데 그런 나의 도시락은 늘 친구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빠는 아예 학교에서 도시락을 열지 않고 친구들 것을 먹는다고 했다. 나는 그런 오빠가 부러웠다. 나는 그럴 배짱도 없었기 때문에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에게 매일 매일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어야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는 한 없이 멋대로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다. 뒤늦은 나이에 대학원도 다니고 책도 많이 보고 성당 생활도 열심히 하며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보험회사에 취직을 하더니 보험 퀸이 되어 한 달에 천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다.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을 하는 것 같더니 그런 성과를 올렸다.


방학 때 잠깐 그 사람 회사에 출근하며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밥 한 공기가 너무 많은데 한 공기만 시켜서 나눠먹으면 안 되냐고 하자 정색을 하며

“나는 한 공기 다 먹을 거야. 네가 남기든 말든 하나 시켜서 따로 먹어.”라고 했다.

눈도 맞추지 않은 채 뱉은 차가운 그 한마디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사람의 언어는 또 다른 형태의 매질일 때가 많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떨어지려는 눈물방울을 간신히 붙들었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무실 사람들에게 들켜버린 것 같아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났다.


몇 년 후, 그 사람이 과로로 쓰러졌다. 뇌염 진단을 받았고 그 사람은 의식이 흐리멍텅한 채로 한 달 정도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약이 잘 맞아서 의식이 돌아오고 퇴원을 했지만 가끔 나와 말다툼을 하는 날에는 여기가 어디냐,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는 바보가 되었다. 히스테리는 좀 더 심해져서 갑자기 한 순간에 돌변해서는 화를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늘 가슴이 쿵쾅거렸다. 전화에 대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까봐.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 한 얘기를 전화로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낼 때가 많았고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음성메세지에 그런 분노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놓기도 했으니까. 그 사람의 날카로운 화는 칼이 되어 내 복부에 콱 박혔고 나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피를 철철 흘리며 하루 종일 비틀거리며 살아야했다. 저항하고 싶었고 무시하고 싶었고 그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더 크게 화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무서웠다. 그 사람의 화 앞에서는 순식간에 울고 있는 여섯 살 어린아이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독립을 하고나서도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전화가 무서웠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결혼 할 사람과 함께 그 사람 집에 인사를 가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다.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더니 네 남자친구를 바꾸라고 해서 바꾸었고 그 사람은 곧 나와 결혼 할 사람에게 다짜고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내 집에 올 생각 하지마! 오기만 해봐. 죽여 버릴 줄 알아!”

나는 마침내 내 삶의 가장 큰 치부를 나의 결혼예정자에게까지 들키고 말았다. 그는 별안간 뺨 몇 대를 후려 갈겨 맞은 사람처럼 얼굴이 벌게져서는 그 자리에 멈춰 서있더니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부르르 떨듯이 흔들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터라 그는 곧 이해를 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앞 날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사위가 될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 사람은 내 삶을 파괴했고, 계속 파괴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다. 혼자 아기를 키우느라 너무 힘들어서 공황장애가 왔다. 공황장애 때문에 생긴 호흡곤란 증상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나에게 전화해서는 너는 손이 없냐, 왜 전화 한 번 안 하냐고 화를 버럭 냈다. 그 땐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화가 터져 나왔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밥도 전기밥솥 열고 서서 퍼먹는데 전화할 정신이 어디 있냐고 소리치면서 엉엉 울다가 확 끊어버렸다. 그 사람에게 내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은 차로 40분 거리에 살았지만 아기를 봐주거나 나를 도와주러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십 원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았다.


둘째를 낳고 시어머니가 멀리에서 올라오셔서 산후조리를 도와주고 계셨는데 그 사람과 아버지가 아기를 보러 우리 집에 왔다.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고 왔다. 결혼식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기 한 번 못 안아 볼 그런 복장으로 우리 집에 온 것이 나는 그렇게도 싫었다. 시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 하랴 아기 돌보랴 며느리 돌보랴 바쁜데 그 사람은 와서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고 손님 대접이나 받고 앉아있는 것이 너무나 꼴 보기 싫고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1시간인가 앉아 있다가 갔다.


그러면서도 돈이 없다, 급하게 얼마가 필요한데 좀 붙여 달라 전화하고 남편이 용돈을 드리면 그렇게 좋아했다. 내가 필요한 건 아무것도 안 주고 자기가 필요한 건 쏙쏙 가져가는 마녀 같은 그 사람. 내가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일상생활이 힘들어 쩔쩔 맬 때도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과 통화하면서 첫째 딸이 보름달 보면서 엄마 빨리 나으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하니 너희 엄마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다.


기억이 깜박깜박 하는 상태이긴 하다. 과거에 앓은 뇌염 때문에. 하지만 꼭 잊어버리는 것이 나에 대한 것이다. 오빠의 생일에는 생일 일주일 전부터 오빠 생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 잊지 말라고 연락을 하면서 내 생일은 잊어버리고 연락도 없었다.



글, 그림 by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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