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중심의 책 쓰기: 공감과 소통

시행착오에 관하여

by 제로




나는 사업 계획서를 작성할 때 '스캐닝 작성법'을 주로 사용한다. 제출 마감 기한이 가장 큰 이유인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처음부터 공란을 채워 넣으면서 빈칸을 메우는 작업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스캐닝 작성법은 목차 설정이 매우 중요한데, 정부 지원사업은 목차 양식이 사전에 세팅되어 있어 곧바로 공란 채우기 작업을 수행하면 쉽게 끝난다.


일반적으로 창업팀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주제별로 자세히 쓰려한다. 이는 학교 시험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라도 끝까지 풀려고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런 방식은 잉크젯프린터 출력 방식과도 닮았다. 자세히 서술된 내용을 한 줄씩 써 내려가는 것이다. 물론 장점도 있다. 하나의 주제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일필휘지 할 때가 가끔 있다. 이때는 오히려 스캐닝 작성법이 방해될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뭐랄까... 바위ADHD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 다시 정정하겠다. 바위바람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작성법을 책에 적용해 보기로 했고, 목차 설정에 무려 2개월을 할애했다. 스캐닝 작성법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나는 2~3줄 이상의 문장을 쓸 자신도 없었고, 전체를 보며 달려가는 삶(시야)을 10년 넘게 해 와서다. 그래서 이 방식이 더 편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전문 서적이라는 점이 가장 큰 결정적 요인이었다. (스캐닝 작성법은 계획서, 논문, 보고서, 기획서 등에 다소 적합한 방법론이다.)





목차가 설정되니 그다음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기준점(키워드)이 생기니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전체 흐름이 머릿속에 덩어리처럼 그려졌다. 이는 목차를 오랫동안 기획하고 시뮬레이션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용의 모형이 대략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글을 쓰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초벌까지 전체 6개월이 소요되었다. 목차 작성 2개월, 내용 작성 4개월인 셈이다. 페이지 수는 B5기준 377p 분량이다.(A5는 500페이지에 육박하므로 B5로 선택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관점에 따라 빠르면 빠르다고 할 수 있고, 느리다면 느릴 수 있는 기간이다. 어떤 에디터는 한 달에 한 권씩 찍어낸다고 하니, 그에 비하면 나는 거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 서적이라는 분야의 특성을 고려해 본다면, 처음 쓴 책치고는 나름 빠르게 썼다고 생각한다. 주변 분들에게 여쭤봤더니 논문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내용인 경우 몇 년이 걸린다고 말하는 걸 봐선, 양호한 편이리라.


그러다 문득 생각의 휴식기를 가졌다. 어쩌면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이 전문 서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얕은 지식으로 수박 겉핥기로 쓴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내 정신을 파고들었다. 언덕을 오르면 작은 산이 보이고, 산 정상에 도달하면 더 큰 산이 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지는 늪에 내 몸을 던질 때면, 내 정체성이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수없이 하게 된다. 휴식기를 마치고, 결국 안 되겠다 싶어 나 스스로 단호히 결론을 내렸다.


완벽을 기하는 것도 좋지만, 내 안의 공명은 가끔 무의미할 때가 있다!



드디어 완성했어!


이대로 간다면 내 나이 70~80세쯤 되어서야 책 한 권 펴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단호히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책이란, 누군가에게 의도와 의미라는 씨앗을 가슴에 불어넣고 싹이 터, 또 다른 그 무엇이 발현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만약 그런 의미라면 나와 독자의 타협점을 상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그렇게 기준점을 잡아보니 "내가 어디까지 심도를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범위를 알아야 했고, 피드백 정보를 수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타트업은 고객의 교육과 문화 수준에 따라 그 니즈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고, 고객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 또한 독자라는 고객을 대상으로 기호에 맞는 상품(책)을 제공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려면 고객의 교육과 문화 수준을 이해해야 했고, 그에 따라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독자의 눈높이와 수준을 맞춰라


아뿔싸!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초벌을 마친 지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초벌 완성 후, 처음부터 내가 쓴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쓰는 과정에서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여간 어색하다.


맞춤법 검사 기능이 한글 워드에 있는지도 몰랐다. 책 쓰기용 한글 워드는 일반 문서 작성과는 다른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서식, 주석, 페이지 구성, 스타일, 용지 설정, 머리말, 꼬리말, 들여 쓰기 규칙 등을 미리 알아두고 설정하는 것) 하지만 나는 본질과 원리에 심취하느라 이런 기본적인 기교를 놓쳤다. 이는 마치, 배우가 연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의상과 분장을 등한시한 것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지금 쓴 초벌 내용이 예비 창업자보다는 창업팀을 교육하는 강사에게 어울릴 것 같다는 점이다. 이 생각에 다시 한번 식은땀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균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초벌 원고의 문제점을 발견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내가 의도한 독자층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책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책의 본질과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다듬는 작업 또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책을 쓰는 과정은 개요 수립에서부터 시작해 초벌, 감수, 교정, 교열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추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도 높은 책이 탄생할 수 있다. 이는 책을 쓰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스타트업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로 본질과 실용성,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힘들다. 책 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스타트업의 성장 과정과도 닮아있는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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