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 쓰기랑 사업계획서 작성법이랑 다를게 별로 없어 보였다. 여기서 방법론을 자세히 논하기에는 다소 무거울듯하여 간략히 설명하면 대락 이렇다. 바로, 스캐닝 작성법이다. 용어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거나, 무의식으로 이 방법을 활용하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 용어는 내가 임의로 부르는 명칭인데, 스캐너처럼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훑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네이밍이다. 고로 별뜻 없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부르겠다. 계약서의 '갑'과 '을'의 명칭이랄까?)
스캐닝 작성법은 차례 항목에 들어갈 내용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스캐너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지나가듯 작성하는 형식이다. 즉, 머릿속에 생각나는 핵심키워드 혹은 한 문장만 각 주제 안에 삽입하면 된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 항목별로 공란을 채워보자.(심리학에서 말하는 초두효과, 그룹효과를 활용한 것이다.)
예컨대, 학교 시험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할까? 그렇다. 일단 건너뛴 후, 쉬운 것부터 끝까지 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고는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시 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물론, 나름의 전략이 있는 사람은 예외로 하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것을 다시 접했을 때, 어려웠던 문제가 쉽게 풀리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것을 잉크젯 프린터 방식(일반 글쓰기)과 스캐닝 방식으로 비교하여 구분했다. 잉크젯 프린터는 어떻게 출력될까? 처음부터 완벽한 이미지를 한 줄씩 출력하지 않던가? 즉, 하나의 주제에 기준이 정해지면 제대로 된 문장과 문단형식으로 내용을 작성하는 식이다. 이것을 일반 글쓰기라 가정해 보자. 스캐닝 방식은 앞서 설명했듯, 완벽한 형식과 내용이 아닌 모든 공란을 최소한 단어하나라도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작성법 프로세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의 내용을 도식화로 그려봤다. 물론,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일반 작성법은 보편적인 작성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작가마다 스타일이 천차만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도식은 작가의 기준이 아닌, 일반인이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정도의 범주에서 바라보자. 스캐닝 작성법을 설명하기 위한 비교 대조군이니 말이다.(첨언하면, 위 '작성법 프로세스' 도식화에서 '임의 주제'는 '임의 목차' 혹은 '임의 주제'설정을 뜻한다. 얼개짜기는 아는 사실이니 생략한다. 오해마시길...)
어쨌거나, 스캐닝 작성법은 목차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 위 도식을 통해 알 수 있듯, 차례를 설정하는데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목차가 설정되면 그 항목을 기준하여, 핵심키워드 혹은 문장을 빠르게 작성한다. 삽입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형식 상관없이 그냥 적는 것이 포인트다. 절대 오래 생각하지 말자. 생각 안 나면 그냥 패스다. 문제가 안 풀릴 때 그다음 문항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 넣는 것이 하나의 사이클이다. 이러한 사이클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마법처럼 내용이 점점 풍성해진다.
문득, 초등학생 때가 생각난다. 선생님이 "이 문제 풀어 볼사람?"이라 말하고 손들어 보라고 하면,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도 그렇다.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을 안 한다. 그 순간, 눈동자는 책상아래로 내려가면서 심장 박동수는 점점 높아진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눈동자를 슬며시 회피하는 기술은 이 순간만큼은 세계 최고일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더듬더듬 대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이에나 무리가 먹잇감을 향해 눈빛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린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한다. '실수만 해봐라. 내가 뒤에서 설명충이 되어 지적질해 줄 테니!'라고 말이다. 드디어, 발표자가 실수 연발을 하고야 말았다.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학생들은 이때다 싶어, 그게 아니라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이럴 땐 사격실력이 백발백중이다. 신통방통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뒷자리 남학생 1, 하이에나의 시선
이것으로 우리는 초두효과, 앵커링 효과가 얼마나 무서운 심리적 기능을 하는지 알았다. 이처럼 스캐닝 방법론은 발표자와 같이 손을 번쩍 드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해주는 방법론이다. 이 기준점에 의해 우리 뇌는 설명충이 되어 기관총을 난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확장적 사고다.
나는 책 쓰기에 스캐닝 작성법을 도입해 보기로 했다. 이 선택은 결국, 목차 완성까지 무려 2개월이 소요됐다. 여기서 혹자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 목차를 설정하는데 2개월이라고? 그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텐데..."라고 말이다. 그렇다. 목차는 내용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스캐닝 작성법의 목차 설정은 단순한 목차 설정이 아니다. 목차의 대주제와 중주제의 스토리 흐름까지 고려한 완성도 높은 목차 구성이다. 예컨대, 숲을 보고 나무를 보며 길을 따라가는 것과 같다.
대주제를 설정했다고 해서 목차구성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이때 목차 항목의 내용을 하나의 덩어리로 상상하며 상호관계를 시뮬레이션해 보는 연습을 병행해야 한다. 구체적 내용을 생각하기보다는, 큰 틀을 상상하며 대주제 간의 맥락을 잡고 스토리라인을 구성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야만 목차 항목 간의 인과관계 및 흐름을 보다 구체적이고 조밀하게 포착할 수 있다.
결국 차례를 설정하면 전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물론, 각 주제별 항목의 구체적 내용은 당장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핵심 키워드를 삽입하여 머릿속에 기준(초두효과)해 놓고 작성하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번에 내용을 보강할 수 있다. 즉, 차례가 설정되면 그다음은 맥락의 범주 안에서 내용이 빠른 속도로 풍성해진다.
1 STEP
2 STEP
3 STEP
다만, 주의 사항이 있다. 스캐닝 작성법은 목차 설정을 기준으로 내용을 빠르게 정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목차 설정이 부실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소주제와의 개연성에서 분절된 느낌을 줄 수 있다.(숲의 관점이 강해서다.) 스캐닝 작성법은 각 주제가 설정된 상태에서 내용을 작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두괄식이나 양괄식이 어울린다. 예컨대 설명문, 보고서, 기획서, 논문, 계획서 등이 적합하다는 뜻이다.
반면, 일반 작성법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나뉘기 때문에, 각 제목으로 구분해도 자연스러운 스토리 흐름이 유지된다. 이 방식은 미괄식이 어울리며, 주로 소설이나 에세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일반 작성법은 1~2인칭 관찰 시점에서 서술되고, 스캐닝 작성법은 하늘에서 땅을 보듯 3인칭 관찰 시점에서 내용을 파고드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얼개 짜기'와 '다발 짓기'에 비유될 수 있다. 다만, 스캐닝 작성법은 '얼개 짜기'를 포함해 차례부터 내용까지 전체를 빠르게 작성하는 큰 틀의 방법론이라는 게 차이점이다.
따라서, 작성법의 선호도는 목적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작성법이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주어진 목표와 환경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식을 선택하고 유연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