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자!'
나의 전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욕을 종종 했다.
(사실 더 많이 자주, 항상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 보니 욕할 만한 상황도 있는 것 같다. 이것도 내 지독한 사랑의 가스라이팅일 수 있지만. )
연애 시절, 기억에 남는 그의 화풀이 중 가장 심했던 것은 길거리에 스마트 폰을 던져 버린 것.
박살이 났다. 그와 함께 내 마음도 박살이 났다.
강원도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차 안에서 그와 나는 싸웠다.
내려!
'씨 X! 장난하냐?'
불과 몇 초 사이에 몸뚱이만 덩그러니, 생판 와 본 적 없는 길에 있었다.
10분, 20분 기다리다가 질질 짜면서, 30분쯤 지난 후부터 걷기 시작했다.
'내 평생, 다시 너를 보면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왔다. 또 여느 때처럼 그는 나를 달래 주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못난 년, 가스라이팅 당했어. 그렇게 자존감이 낮아서..'라고 욕하지 말기를 바란다.
싸운 이유는 항상 쌍방이니까.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겠지만,
그의 성질을 긁은 내 지랄 맞은 성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헤어지지 못했다.
이 사람 아니면, 결혼을 못할 것 같은 불안감.
꽤나 넉넉한 그의 집안. 그리고 결정적 이유!
엄마의 가스라이팅이 준 결과다.
" 너네 아빠 같은 무능력한 사람 말고 무조건 생활력 강한 남자 만나야 해. 무조건이야.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는 생활력이 강했다. 아니, 강해 보였다.
잡아야 했다. 나는 무서운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효녀이자 책임강이 강한 장녀가 되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100번 싸움에서 100번 늘 먼저 손을 내미는 내가 불쌍해졌다.
'딱 한 번 자자! 너와의 마지막 잠자리야'
아련한 이별을 혼자 준비하던 내게 자궁의 속도는 감당할 수 없었다.
덕분에 논문을 배가 부른 채 마칠 수 있었고, 통역을 무거운 몸으로 뒤뚱 거리면서 할 수 있었다.
그는 아주 기뻐 날뛰었다.
"걱정 마! 내가 다 책임질게.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거였으니! 잘 됐어!"
곧, 그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친정 부모의 거짓이 만연했던 사기극, 배신과 폭력, 폭언이 난무했던 그 무너지는 가정 속에서
나는 모두를 위해서 결심했다.
잔다르크 신드롬에 빠져서 내가 무척 용감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절대 이혼은 안 돼! 너는 내가 책임져!'라고 한 그.
하지만 장인장모에게 배신을 당한 그는 술을 먹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술을 먹고 나서는 늘 끔찍한 욕과 물건이 집안 곳곳을 날아다녔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싸움은 지독했던 혈투인데.
나, 임신 같아.
그가 믿지 않았다. 우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 그럼, 이 와중에 내가 바람이라도 폈냐? 네가 며칠 전에... 술 먹고 그랬잖아.)
내 자궁에게 있어서 '강제든 자발적이든'은 중요치 않았다.
자궁은 자궁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혼서류를 비웃으며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피곤했던 집착과 피해의식의 열등감, 점점 더 심해진 감정의 골로 그와 나는 빠지기 시작했다.
가족과 가족이 싸우기 시작했다.
가해자-피해자가 되어서 서로 물고 뜯고, 그야말로 난장판 난투극이다.
의사는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폐경 판정을 받은 지 1년이 지나, 죽었던 자궁이 또 움직였다.
"어? 다시 살아났네. 난소도 일하고 있고. 거 봐! 조심해야 한다니까요. 생리 맞네요!"
(조기 폐경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다시 생리가 부활되기도,
또 폐경을 겪고도 임신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사랑인지 이별인지 고민하고 있던 20대의 내게,
얼마나 아픈지도 제대로 못 느낄 만큼 갈팡질팡 하고 있던 30대의 내게,
후회를 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위선을 떠는 40대의 내게,
자궁은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