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간
카드로 350만 원을 내면서 '재혼 회사 등록'이라는 소심한 복수를 했을 때도,
세 번의 남자들을 만날 때도 나는 오히려 전 남편이 더 생각났다.
사랑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라고 하던데
'무관심' 그게 맞다.
지독한 건망증 혹은 치매에 걸리지 않고, 최소 부부였던 사람들이 서로를 인지 못 할 수가 있을까?
불가능하다. 머리는 기억 못 해도 마음은 다 기억하니까.
한 술 더 떠서, 길 가다 마주치면 '아! 잘 지내니?'라고 물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다면 감사하겠지만.
전 남편이 내게 마음이 정리되었다고 하고 만난 그 첫 번째 여자.
그때의 감정은 최소한 그에게는 '진짜'이었다.
철벽 같았던 내 성벽을 부시려고 모든 수고를 다 한 그는 깔끔하게 단념을 했다.
최선을 다한 마음의 정성이었기에 그는 후회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갔다. 삶이 어긋나니 마음의 속도도 못 맞춘다.
사랑인지 미움인지도 구분이 안 된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뒤늦게!!
내 사랑의 온도계는 항상 고장 나 있다.
나: 애들은 어떻게 하려고 만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
전 남편: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 만나니 네가 잠깐 헷갈리나 보다. 그런데 네가 나는 죽어도 아니라며. 나랑은 절대 재결합 안 된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이래? 적응 안 돼!
나: 아니, 그러니까 결혼할 거냐고? (대놓고 결혼부터 묻는다. 역시 사랑의 온도는 못 맞춘다.)
전 남편: 너는 연애하자마자 결혼하냐? 내가 무슨 바보야? 나 그냥 다른 사람 만나게 내버려 둬!!
(그는 그 당시 3개월 정도 보통 어른들의 진짜 연애를 했다.)
(뭐라니? 내가 지금..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일단 내뱉었다.)
전 남편: 뭐라고?? 너랑 나랑 이혼했잖아. 뭐 문제 있냐?
나: 아니, 그래도 우리 한 집에 있는데.
전 남편: 그래서 네가 나한테 손이라도 잡게 했냐? 어이가 없다. 진짜. 우리 남이야. 남남!!
(나도 안다. 나의 말은 부끄러울 만큼의 망언이라는 것을.
때아닌 윤리 정신이라도 강조하면서 그를 내게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 연애를 묵묵히 자발적으로 견뎌내야 했다.
시간이 점점 가니, 그들은 삐걱거렸고 헤어졌다.
찐한 사랑이 찐하게 끝을 냈다.
전 남편은 그러면서 계속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녔다.
허했다. 그는 배가 고픈 듯 채워지지 않은 그 마음을 채우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 주변에서 계속 머물면서 기다렸다.
때때로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내 나름의 유치한 복수를 하기도 했다.
가령, 그의 칫솔을 일부러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씻지도 않고는 다시 올려놓는...
그의 서투른 몇 번의 연애 앞에서 나는 조금 불안했다.
작은 불안은 거대한 오차를 불러왔다.
그가 연애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는 '결혼'은 절대 안 돼! '재결합만큼은 안 돼!'를 외쳤다.
내 사랑은 항상 심하게 뒤쳐지거나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결국 종착지는 나야. 아니 내가 될걸!'
착각도 자유이겠지만 이 정도쯤이면 과대망상 중증이다.
하지만 이혼한 남편에게 '바람피우냐'라고 소리 지르면서
그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사랑은 끝낸다고 끝내지는 것이 아니다.
시작한다고 함부로 시작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구걸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포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그냥 막연한 믿음 그 자체이다.
사람 그 자체를 믿는 것.
내 결혼도 나를 위함이었고
내 이혼도 결국 나를 위함이었다.
모두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이기적인 나를 위한 결심과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여자처럼
또 그와의 연애를 꿈꾸고 있다. 현실 가능성 제로다.
이혼은 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은 내 안의 불안함과 맞서는 용기이다.
약함이 강함으로 되는 순간.
내 안의 진짜 나를 보게 되는 순간이 사랑이다.
나는 그를 통해서 진짜 허상의 나를 보기 시작했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없다.
오래될수록 더 진한 맛이 우려 난다.
그 맛을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