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사유는 길게 쓰면 안 돼요?
협의이혼이냐 소송이냐가 문제인데,
일단 협의이혼을 결정하면
서류에 빈칸을 하나씩 채우면 된다.
시험 문제에 답을 달듯이 간단하다.
나의 이혼사유: '가정폭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친정 부모의 사기극이 낳은 막장 드라마?'
친정 부모가 나의 결혼생활에 개입해서 그 결과 남편이 시댁에 거짓말을 하고
돈 투자가 거짓이 되고, 시댁 부모님에게 오랜 거짓이 다 들통나게 되고
돈 많은 시댁은 나를 '사기꾼'취급하고.
친정은 망했는데 갈 곳 없어서 불편한 딸 노릇을 해야 하고
남편은 견디다 못해 술에 의존해서 나를 때리고 집 밖으로 내쫓고.. 하....
길다. 답이 너무 길다. 장황한 스토리다. 그런데 거짓이 하나도 없다.
나는 결국 '성격차이'로 적었다.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나의 이혼사유는 짧은 답보다는 장문의 서술형 답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 남편의 답은 깔끔했다.
'고부갈등'
나: 뭐야? 우리가 고부갈등으로 헤어지는 거야?
전 남편: 응, 아냐?
그는 이혼한 사유부터 나와 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장인장모의 사기행각도, 처갓댁이 쫄딱 망한 것도
심지어 자신이 내게 한 그 끔찍한 행동도 지울 수 있는 정화 능력이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더니.
이혼 역시,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우리는 가정 법원에서 다소 시끄럽게 다른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수다를 떨었다.
나: 저기는 좀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렇지?
전 남편: 그래, 그래도 붙어서 앉아 있네.
전 남편은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이혼서류를 들고.
전 남편이 다시 물었다.
전 남편이 : 그래도 이혼은 좀 그러니 다시 갈래?
나: 아니, 절대!! (왜 이래, 이 인간?)
전 남편 : 그래..... 알겠어,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하자.
아이가 있으니 양육비, 양육권, 친권 적는 칸도 우리에게는 난이도 최하이었다.
나: 양육권 친권 모두 나야. 알았지? 그럼 양육비 얼마라고 쓰지?
전 남편: 아이당 200만 원으로 해야 하나? 둘이니 400만 원 쓰자. 아, 어차피 네가 키울 건데 더 쓸까?
(이혼 가정상담에서 알았다. 그 금액이 그토록 큰 금액이라는 것을.)
상담사는 계속 물었다.
상담사 : 진짜 아버님은 친권, 양육권 포기이시죠?
그가 큰 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와이프가 잘 키우고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하니까요.
상담사가 우리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이렇게 손을 잡고 계시는데, 꼭 이혼을 하셔야 하는 결정적 이유가 있으세요?"
남들은 이해 못 했지만, 우리는 행복하고 깔끔하게 이혼을 했다.
"이혼, 뭐 별 거 아니네. 뭐가 어렵다고?"
마치 어려운 시험 하나는 거뜬히 푼 모범생처럼 간결한 답을 쓰고 도장 찍고 검사받으면 끝이다.
나의 이혼 점수는 100점이다.
엉켜 있는 문제는 '이혼'이란 답 하나가 만능 치트키로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혼을 하니 더 끔찍한 바닥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억이란 어마어마한 빚.
이혼 후 고스란히 아이의 몫으로 온 찌꺼기 감정들.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친정 부모의 절망과 자책감.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시댁 부모의 마음의 흉터.
이혼인 듯 아닌 듯 모호한 경계 속에서 매일 널뛰기하는 감정.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의 본질은 잊고 생채기만 내는 남과 여, 우리.
잊지 못하는 상처의 트라우마는 점점 더 풀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을 안고 왔다.
이혼을 한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듯한 세상 속에서 숨어야 했던 진짜 내 모습.
시간이 흐를수록 풀 수 없었다.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고
아무리 훈련을 하고 준비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뭐든 인생에서 100점을 맞아 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참 잘했어요!"
이혼도 인생에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반겨 줄 텐데. 썩 내키지 않는다.
친한 사람한테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냥 10점이라도 손해 보지 않는 게 최고더라.
이혼이 나쁜 게 아니라
이혼 후가 만만치 않음이 더 맘에 안 든다.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상처 위에
자꾸만 상처를 덧입힌다.
오답인 줄 모르고 다음 문제를 푸니
계속 더 문제가 꼬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