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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Jul 12. 2023

구름 속을 걸으며

 ‘올드 맨 오브 스토르(Old Man of Storr)’를 방문하는 날 아침,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마을 중앙의 광장에서 가로수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버스에 올라탔다. 도로를 달리며 창밖을 내다봤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어떻게 그런 색조의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펼쳐진 황량한 잿빛 벌판과 검은빛의 호수, 그 호수 속에서 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날 내가 방문할 곳과 어울리는 날씨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이랜드에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할 때 ‘올드 맨 오브 스토르’의 사진을 보게 됐다. 인간들을 공격하는 외계인이 나오는 한 SF 영화에서 나오던 곳인데, 바닷가 바로 옆에 우뚝 솟아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던 그 거대한 바위가 아일 오브 스카이 섬에 있는 줄은 몰랐다. 사진을 보는 순간 반갑기도 하고 이 신비스러운 장소야말로 여행의 한쪽 끝으로 제격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도를 보며 처음에는 이 넓은 섬을 걸어서 돌아다니려 했다. 포트리에서 ‘올드 맨 오브 스토르’까지의 거리가 십 몇 킬로미터인데 이 정도면 부지런히 걸어 두 시간이면 갈 수 있겠네, ‘올드 맨 오브 스토르’에서 다음 방문지인 ‘퀴랑’까지 이십 킬로미터가 좀 넘는데 이것도 부지런히 걸으면 세 시간 정도에 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다, 걸어서 포트리까지 돌아오면 한 밤중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던 것인데 버스를 타보니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멀리 ‘올드 맨 오브 스토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섬 전체에 낮게 깔려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먹구름이 산 정상을 지나고 있었는데, 뱀처럼 기어서 산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섬뜩해졌다. 그 속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인신공양의 제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올드 맨 오브 스토르' 근처 도로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따로 정류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 옆으로 승용차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이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인 것 같았다.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불었다. 비닐 우비를 입고 올라갔는데 우비가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몸에서 계속 요란한 소리가 나니까 마음까지 심란해져서 꼭대기에 다가갈수록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됐다.


 주변에 깔린 구름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오자 멀리 구름 아래로 바다와 야트막한 산들이 보였는데, 땅 위에 발을 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혹여 구름에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몸을 잔뜩 숙인 채 기다시피 걸어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들이닥쳤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구름 한가운데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빗방울을 맞으며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올드 맨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멀리서부터 구름 사이로 빛이 뚫고 들어오더니 땅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서 구름이 물러가는 속도도 빨랐다. 갈라진 하늘 아래로 산 주변에 펼쳐진 파란 바다가 보였는데 햇빛을 받아 빛나는 바다와 벌판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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