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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Aug 26. 2023

미친바람

 언젠가 TV에서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북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변화무쌍한 바다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기회가 된다면 그 사나운 바다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북해와 맞닿아있는 스코틀랜드 끝자락 섬에서 어디를 가야 그 거친 바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찾던 중에 ‘니스트 포인트’를 알게 됐다. 섬의 북서쪽 끝에 있는 니스트 포인트에는 등대가 있었는데, 보통 배가 좌초하기 쉬운 바닷가에 등대가 설치된다는 걸 생각하면 북해의 거친 파도를 감상하기에 제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스트 포인트를 찾아가는 날은 지역 여행사의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를 이용해 보니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제약이 있는 데다, 섬의 크기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전날 방문했던 ‘올드 맨 오브 스토르’와 ‘퀴랑’은 내가 묵고 있는 포트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이 날 방문하는 ‘니스트 포인트’와 ‘페어리 풀’은 섬의 반대쪽에 있었고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여행사가 제공하는 작은 승합차를 타고 니스트 포인트로 출발했다. 약간 건들건들한 이미지의 운전사여서 걱정했는데, 옆자리에 앉아 같이 얘기해 보니 내 엉터리 영어도 잘 받아주고 웃으면서 친절히 대해줬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의 색은 역동적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벌판에는 녹색과 황금빛이 도는 잡초들이 뒤섞여 있었고 간혹 짙은 갈색의 덤불이 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누가 일부러 파헤쳐 놓기라도 한 듯 검은빛의 흙들이 군데군데 보였는데,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땅에 햇빛이 비치거나 구름이 드리울 때마다 때로는 양들이 풀을 뜯는 평온한 풀밭으로, 때로는 모두가 떠나고 아무것도 안 남은 잿빛 벌판으로 변했다. 한 언덕을 넘자마자 짙은 구름 아래 우뚝 솟은 검은 산이 나타났을 때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 반지가 만들어진 검은 화산을 보는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니스트 포인트가 가까워지면서 차창 밖으로 요란스러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는데, 차 안에서도 이렇게 소리가 들릴 정도면 도대체 밖은 얼마나 세게 바람이 불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났다. 니스트 포인트로 내려가는 절벽 입구에서 차가 멈춰 섰다. 긴장하며 차문을 열었는데, 여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들이닥친 것이다. 한국에서 강한 태풍이 왔을 때처럼 몸을 가누기 힘든 정도였다.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는 나를 두고 가이드는 몇 시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절벽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왼편으로 바다 건너 거대한 절벽들이 보였고 앞으로는 흐린 하늘 아래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북해가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날아갈 것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자꾸 웃음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절벽을 따라 난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벽을 내려가면 바로 등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절벽을 다 내려가고 나서도 몇백 미터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 양의 똥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런 강풍이 부는 곳에서도 양들은 아무렇지 않게 풀을 뜯고 배설하고 있었다. 똥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걸었지만 어떤 것은 알면서도 밟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바다로 떨어지는 수직절벽인 작은 언덕을 넘자 마침내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대 자체는 특별히 볼 게 없었다. 등대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등대에 딸린 부속 건물들을 대충 둘러보고 파도가 부딪치고 있는 바닷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 무너져 내린 철조망을 넘어 조금 더 걸어가자, 파도가 부딪치고 있는 검은 바위들이 나타났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바위를 향해 파도가 부딪칠 때마다 흰색 물보라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는데, 물벼락을 맞지 않게 조심하면서 최대한 바다 가까이 다가갔다. 손으로 바닷물을 만질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해서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북해 바다에 손을 씻었는데, 바닷물을 만지고 거기에 손을 씻는 건 여행의 북서쪽 끝까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뜻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바람을 맞으며 바로 앞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감상하는데, 등대로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이 갈라지면서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강풍이 구름을 몰아낸 것이다. 또 올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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