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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다이드 Sep 10. 2023

포트리의 밤

 페어리 풀의 바위산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도로까지 걸어 나오면서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에 늦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도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가이드의 차가 오는 게 보였다. 내가 도로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본 가이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포트리로 돌아가는 차 안의 분위기도 좋았다.


 가는 길에 가이드가 저녁은 뭘 먹을지 정했냐고 물어봐서 아직 안 정했다고 했는데, 가이드가 대략 어느 정도의 가격을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자 가이드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가격 상한선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내가 “5 or 6 pounds”라고 하자 큰 소리로 웃더니 “Fish and chips”라고 농담을 건넸다. 바로 전날 피쉬 앤 칩스를 먹어서 또 먹고 싶진 않았지만 5 파운드 정도면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포트리에 도착해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차에서 내리는데, 운전기사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근처에 있는 태국 음식점으로 가는 길을 얘기해 줬다. 가이드에 대한 첫인상 때문에 사실 그런 친절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차 안에서 내가 한 말을 듣고 운전하면서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니 고마웠다. 가이드는 음식점 위치만 얘기해 주고 바로 가버렸다. 가이드가 알려준 태국 음식점은 메뉴 하나가 대략 5파운드에서 6파운드 정도였는데 내 예산 계획에 정확히 맞는 곳이었다. 나시고랭 볶음밥을 포장해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 저녁에는 국세청의 연말 정산 사이트에서 연말 정산 신청을 했다. 포트리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밖에 나가 밤바다의 운치를 즐길 수도 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없는 상태로 1년을 보내고 나니 소액이긴 해도 연말 정산 환급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지고 간 구형 노트북이 원래 느린 데다 인터넷 환경도 열악해서 평소 같으면 금방 할 수 있는 있을 한참을 걸려 겨우 끝낼 수 있었다. 함부르크에서부터 틈틈이 해오던 일을 마무리하자 마음이 개운해지면서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호스트 부부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집안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괜히 법석을 떠는 것 같아 불도 안 켜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앞에 현관이 있었는데 방심하고 현관문으로 걸어가다 사고를 쳤다. 호스트 내외가 문 앞에 세워둔 나무판을 발로 건드려 넘어뜨리는 바람에 와장창 하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진 것이다. 2층 침실에 있던 부부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할 때 이곳은 치안이 좋기 때문에 밤에 잘 때도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정말로 자면서 문도 안 잠그고 대신 문 앞에 나무판을 세워놓은 것이다. “도둑이야!”를 외치며 호스트 내외가 쫓아 나오진 않았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숙소 앞 도로 위에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다시 안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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