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다이드 Sep 21. 2023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포트리를 출발하는 날 아침, 같이 식사를 하는 부부에게 밤에 요란한 소리를 내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예상했던 대로 문 앞에 세워둔 나무판이 넘어지면서 낸 소리를 부부도 들은 것 같았는데, 둘 다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들이 미안하다고 했다. 깜짝 놀랐을 텐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웠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호스트 부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을 광장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면서 화장실을 갔다 오다 호스트 남편과 마주쳤다. 호스트 남편이 일하는 곳도 광장 근처에 있었는데 일하다 잠깐 밖에 나온 것 같았다. 이 날 아침 식사를 할 때 호스트 아내가 나보고 왜 자신이 만든 초를 안 사려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었는데, 옆에서 이 남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중재해 줘서 난처한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와 마주친 순간 왜 그리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듬직하고 다정한 사람과 다시는 못 볼 거라는 게 아쉬워서 가볍게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아일 오브 스카이 섬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섬의 모습을 감상했다. 빛에 따라 극적으로 바뀌는 그 다채로운 색상의 땅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첫날 섬에 들어올 때 폭우와 비구름 뒤에 숨어있던 가파른 민둥산들이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이 산들은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괜히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섬에 머무는 동안 다른 일 하느라 바쁘다며 만나주지도 않더니, 막상 간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나온 것 같았다. 까칠했지만 또 보고 싶은 모습들이었다.

 육지와 연결된 다리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섬의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 섬에 들어오던 날 봤을 때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로 바람 부는 마을의 모습이 스산해 보여서 왠지 모르게 무서웠는데, 이 날 아침 본 마을은 햇빛이 비추고 있는 여느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불과했다. 다리를 건너 섬을 빠져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높다란 다리를 건너는 동안 차창밖으로 보이는 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멀리 보이는 산들의 머리 위를 구름이 덮고 있는 게 보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아일 오브 스카이 섬과 마주한 '카일 오브 로할시'에 에든버러행 기차를 타는 역이 있었다. 1층으로 된 자그마한 역이었다. 역 바로 옆에 작은 항구가 있었는데, 철로가 안 깔려 있었다면 부둣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고로 생각했을 것이다. 기차 출발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일찍 출발했는데 너무 일찍 온 것 같았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역사에는 사람도 없었고 한산했다. 한적한 부두를 걸으며 배들을 구경하고 맞은편 아일 오브 스카이 섬의 모습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와 커피 잔을 하며 웹 서핑을 하려고 했는데, 노트북 컴퓨터를 배낭에서 꺼내려다 바보처럼 커피잔을  넘어뜨려 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맥도널드에서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버린 커피가 머릿속을 스쳐 갔는데, 다행히 여기서는 커피잔의 뚜껑이 안 열려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는 사이 어딘가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기차가 도착할 무렵이 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벌여놨던 짐을 다시 배낭에 챙겨 넣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이제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전 11화 포트리의 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