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다이드 Aug 31. 2023

왕좌 앞에서

 니스트 포인트에서 북해를 보고 다시 포트리로 돌아왔다. 운전기사의 식사 시간이자 내 식사 시간이기도 했는데, 운전기사는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고 나는 혼자 남아 아침에 산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다 먹고 났는데도 시간이 많이 남아 광장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작은 숲 사이로 난 길을 올라가자 중세시대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망대가 나타났는데,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숲 한가운데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는 망대는 뭔가 아름다운 전설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포트리 항구는 평화로웠다. 망대 위에 올라가 바다 건너 섬과 잔잔한 바다 위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바라보다 운전기사와 만날 시간이 되어 언덕을 내려왔다.


 ‘페어리 풀’을 찾아가는 길은 요정의 연못으로 가는 길답게 간간히 숲도 있고 섬의 다른 곳처럼 척박하지가 않았다. 차는 섬의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뭔가를 지키듯 나란히 서 있는 민둥산들을 지나 마침내 요정의 연못으로 가는 입구에 도착했는데, 저 멀리 먹구름 아래로 다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산이 보였다. 희한했다. 하늘이 맑았는데 유독 그 산 위에만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그곳에 요정의 연못이 있었다. 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산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데 방금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던 운전기사가 무서운 표정으로 약속 시간에 늦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제때 퇴근하지 못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여태까지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과 그럴 때마다 굉장히 짜증스러웠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날은 돌아가는 차 안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를 보내고 벌판으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위산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옷깃을 여미며 산을 향해 걸어갔다. 도로에서는 안 보였는데 사람들이 다니는 길 옆으로 시내가 흐르고 시냇물이 모여 웅덩이와 작은 폭포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위산 바로 앞에 연못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것을 보면 벌판 속에 숨어 있는 이런 작은 연못들을 요정의 연못이라고 했던 것 같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요정들이 몰래 머물다 갈 것 같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마침내 먹구름 아래 있는 바위산에 도착했다. 먹구름과 파란 하늘 사이의 경계선에서 주변을 빙 둘러봤는데, 불과 몇 미터 앞의 파란 하늘 아래와 내가 서 있는 구름 아래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햇빛이 비치는 날 누군가 우산을 들고 서 있기라도 하듯 밝게 빛나는 주변과 달리 구름 아래는 음울한 잿빛이 배어 있었다. 이 섬에 서려있는 음울함의 주인이 바위산 위의 자기 자리에 앉아, 시내를 흘려보내며 앞에 보이는 파란 하늘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랑 같이 걸어온 사람들 중에는 바위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계속 걷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구름과 파란 하늘의 경계선 아래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바위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밑에서 올려다보고 싶었다. 구름 아래 그의 발 언저리에서 풀을 뜯는 양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운전기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생각나 바위산의 주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왔다.



이전 09화 미친바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