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쳐서 다행이었다. 비가 와도 돌아다니는데 지장은 없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양손을 휘저으며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하늘의 색과 그 아래서 다채롭게 물들어가는 땅 위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훨씬 좋다. 해가 지기 전에 짙은 구름이 벗겨져 나가서 센강에서 노을로 물들어가는 파리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센강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너무 많이 우려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노트르담 성당의 야경을 본 적이 없었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성당 앞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미사가 막 끝난 모양이었다. 거대한 성당의 문을 통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낮에 왔을 때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유적지였지만, 저녁에 와보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자 보통의 성당 건물이었다. 몇백 년 동안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의 혼이 서려있는 장소, 그것도 몹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한 거대한 성당에서 높은 천장 가득히 울려 퍼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깐 동안이지만 천국에 온 것 같은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한동안 머물다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려면 센강을 따라 주욱 걷기만 하면 되지만, 빨리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센강을 건너 시테섬 맞은편으로 가 아무 골목이나 내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밝은 조명 아래 레스토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을 걷는데 누군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를 따라간 곳은 가볍게 술 한잔을 하는 바 같았는데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진 않고 쇼윈도 바로 앞에 붙어 서서 여자가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천천히 걸었는데 한 레스토랑 앞에서 작은 칠판에 적어놓은 메뉴를 구경하는 중에 안에 있던 종업원이 나오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데 가격을 보니 가볍게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친절하게 다가온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밖에 내놓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회식이 생각났다. 삼겹살을 먹고 그냥 헤어지기 아쉽다며 맥주를 마시러 가곤 했었는데, 어두컴컴한 자리에서 뭔가 심오한 주제에 대해 누군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면 옆에서 치킨을 뜯어먹으며 열심히 들어주곤 했었다. 두세 명씩 짝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었다. 이왕이면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테이블에 같이 앉아 별 것도 아닌 얘기를 실컷 떠들어 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상관없다.
한 골목에서는 젊은 남녀 수십 명이 한 곳에 모여있어 패싸움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몸을 잔뜩 사리며 다가갔는데 알고 보니 술집 안에 있다 가게 앞에서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담배 피우는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 보면 담배 한 대 피우겠다며 나갔다 오시곤 하던데 이 사람들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썰렁한 밤거리에 술집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대학 시절 술도 못 마시면서 동기들 술자리에 따라간 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취해서 비틀거리는데 혼자만 멀쩡해서 아무도 없는 늦은 밤거리에 우리 일행이 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걸 바라보던 때가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