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방을 빌려주기로 한 호스트의 집은 네프스키 대로의 반대편 끝에 있었다.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호스트의 집까지 걸으며 석양에 물들어가는 도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건물들도 예쁘고 수로와 다리, 분위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레스토랑들은 빈자리가 없이 꽉 차 있었고 거리 전체에 사람도 많고 활력이 넘쳤다. 원래 최대한 빨리 걸으려고 했는데 틈틈이 멈춰 서서 사진도 찍고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다 보니 땅거미가 질 때 즈음에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스트의 아버지와 연락을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주소지에 적힌 거리를 못 찾아서 한참 동안 숙소 근처를 헤매야 했다. 어렵게 만난 호스트의 아버지는 풍채가 좋고 흰머리가 간간히 보이는 잘 생긴 중년 남성이었다. 서로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인사했는데 그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지구 반대편에서 가족을 만난 기분이었다. 호스트 아버지의 안내로 내가 묶게 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대로변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아파트인 줄은 몰랐다. 한국의 아파트는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들이 줄을 맞추어 서 있고 건물 주위에 주차장과 공터가 있었는데, 이곳은 건물들이 성벽처럼 이어져서 단지 안의 공터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단지 입구의 철문을 지나는데 호스트의 아버지가 저녁에 외출하면 반드시 철문을 닫고 다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얘기했다. 유독 강조하는 이유를 물어봤는데 공터 한 구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안 좋은 곳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가게냐고 물어보니 키스라는 얘기를 하면서 얼버무려 버렸다. 그러고는 철문을 열어놓으면 사람들이 드나드니까 반드시 닫고 다니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아파트의 외관은 멋있었지만 건물 안은 낡고 불편했다. 계단과 복도는 그냥 시멘트 바닥이었고 아무런 인테리어도 안 돼 있었다. 무엇보다 6 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캐리어 가방을 들고 6층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침내 3 일 동안 묵게 될 숙소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갔는데 집 안은 아파트 복도와 다르게 깨끗하고 아늑했다. 호스트가 현재 거주하는 건 아니고 호스트가 살던 집이었는데 가구와 살림살이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내면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얘기해주고 집 열쇠를 건넨 후에 호스트의 아버지는 가버렸고 아파트에는 나 혼자 남았다.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내 방에 돌아와 짐을 풀었다. 창문을 열었는데 주황색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누군가와 같이 이 낭만적인 풍경을 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배가 고팠다. 첫날 저녁은 근사한 음식점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여행 초반이니 돈을 아끼기로 했다. 배낭에서 작은 가방을 꺼내어 메고 집 열쇠를 챙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 아파트를 나섰다.
저녁 공기가 쌀쌀했다. 가벼운 가방만 멘 채 러시아 사람들과 뒤섞여 걸으니까 마치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숙소 근처의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6일 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나 말고도 여행을 온 것처럼 보이는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 가게에서 동양인은 나와 어떤 중국인 가족뿐이었다. 생수와 빵, 과일, 약간의 간식거리를 샀는데 과일을 사는 게 까다로웠다. 과일을 봉지에 담은 후에 무슨 태그를 뽑아서 붙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가격표도 없고 과일별로 번호가 적혀있는 팻말만 있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사람이 사용법을 가르쳐줬는데 생각보다 간단했다. 과일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전자식 저울에 올려놓고 팻말에 써진 과일의 번호를 누르면 봉지의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 가격이 인쇄된 태그가 출력됐다.
진열대에는 기차에서 맛있게 먹었던 롤똔도 있었는데 신선한 음식을 먹고 싶어서 별로 당기지가 않았다. 음식을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와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바로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6 일 동안 기차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머리도 감았지만 몸 구석구석의 때까지 닦아낼 수는 없었다. 샤워기를 틀어서 온 몸을 뜨거운 물로 적시고 타월에 샤워 젤을 듬뿍 덜어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묵은 때가 녹아내리고 샤워 젤의 꽃향기가 몸에 스며드는 게 느껴지자 6 일 동안 온몸에 쌓였던 피로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한 가지 찜찜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온 몸에 두드러기가 퍼져 있었다. 작은 두드러기가 아니라 모기에 물려서 생긴 것과 같은 커다란 두드러기들이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에 퍼져 있었는데 왜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뭘 잘못 먹었거나 빈대 같은 벌레에 물린 것인데 몸 전체에 퍼진 걸 보면 아무래도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물도 사 마셨고 특별히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지 따져보려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자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안 나는 조용한 방에서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황홀함으로 공중에 잠깐 떠 있다가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