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푹 자고 잠에서 깼다. 침대에 누운 채 햇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방안의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 날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가는 날이었다. 원래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때를 빼면 미술관에 가 본 적도 없는 내가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하기로 한 건 순전히 이 미술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세계 3 대 미술관 중의 하나라는데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명성이 그리 자자한지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이왕 가기로 한 것인데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어서 아침에 서둘러 준비하고 숙소를 나섰다. 미술관은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미술관 앞에 있는 광장에 들어서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광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기둥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광장은 한산했다. 날씨가 쌀쌀해서 옷깃을 여미며 미술관 쪽으로 걸어갔다.
미술관 앞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러시아 내국인이 입장하는 줄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이 입장하는 줄이었다. 두 줄 다 백인들이 서 있어서 어느 쪽이 내국인이고 어느 쪽이 외국인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서야 할 줄을 찾고, 줄에 서기 전에 무인 티켓 판매기에 가서 표를 사고, 미술관에 입장하는 데 특별한 이슈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약간 헤매고 나서야 줄을 설 수 있었다.
기다리는 줄이 길었지만 입장도 빨리 이뤄져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직접 들어가서 마주한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들어봤던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데 예술에 문외한인 나조차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관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눈앞에 있는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는 것을 듣다 보면 한 작품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특별히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밀하게 묘사된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간 것 같았다. 작은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뭘 먹는지, 뭘 입고 있는지, 하루 동안 뭘 하며 보내는지를 봤는데 보통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궁핍하고 고단해 보였다. 흙이 묻어있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은 스테이크도 아니고 신선한 야채가 들어있는 샐러드나 갓 구운 빵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죽 비슷한 음식 아니면 감자 같은 것을 식구들끼리 나눠먹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초상화에 그려진 당시 귀족들을 보게 됐는데 괜히 화가 났다. 자기들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그토록 궁핍하게 사는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근엄하고 기품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데에만 애를 쓰고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계속 돌아다녔는데 미술관에 있는 작품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 박물관 문을 닫을 때가 되자 빨간색 줄이 쳐져서 들어갈 수 없는 구역들이 하나씩 생겼는데, 관람 불가 지역을 피해 다니며 아직 볼 수 있는 구역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나오려고 했다. 관리직원들과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빨간색 줄이 사방에서 관람객들을 조여오기 시작했는데 결국 양 떼가 몰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서서히 미술관 밖으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 밖의 분위기는 아침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청명하던 하늘에서는 부슬비가 내리고 반원형의 광장에 수천 명의 군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광장 중앙의 군악대와 광장 한구석에서 깃발을 들고 입장을 기다리는 의장대원들을 보니 곧 행사가 시작될 거 같았다. 비도 피할 겸 미술관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미술관 앞에 만들어진 단상에 있던 지휘관이 마이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는데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의장대원들이 깃발을 치켜들더니 무릎을 쫙 편 채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기 시작했다. 발걸음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음악에 맞춰 한 걸음씩 척척 걸어가는 모습은 텔레비전에서도 봤던 것이었다.
한 걸음씩 비장하게 내딛다 보니 중앙의 단상까지 오십 미터 정도를 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의장대가 단상 앞에 도착하자 다시 단상 위의 지휘관이 지시를 내렸고 광장에 사열해 있던 군인들이 군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러시아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에서 따로 부르는 느낌이었는데 계속 부를수록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후렴부에서 광장에 있던 군인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부르는데 광장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러시아 국가가 그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줄은 그전까지 몰랐었다. 웅장한 국가를 듣는 동안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국가가 끝나고 지휘관의 부대 사열이 시작됐는데, 가끔 지휘관이 탄 지프차가 멈추면 그 앞에 있던 부대원들이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사열이 끝나자 군인들은 군악에 맞춰 행진하며 광장을 빠져나갔고 나도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