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표

by 히다이드

회사에서 배운 몇 가지 유용한 것들 중에 일정표를 작성하는 것이 있다. 대략적인 계획을 적는 것이 아니라 매일 완료해야 할 작업의 목록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너무 큰일이라 나 혼자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상세하게 쪼개진 매일의 일정을 따라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의 대략적인 얼개가 나오자 과연 나 혼자서 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준비하다 다른 게 생각나서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다, 다시 또 다른 문제가 생각나서 그걸 알아보려다 지쳐서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리기 일쑤였다. 이런저런 생각만 머릿속에 떠오르지 실제로 준비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몇 주 동안 계속됐다. 그러는 중에도 출발일은 다가오고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회사 프로젝트에서 쓰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선 표를 하나 만들고 거기에 출발 일시와 도착 일시, 방문할 도시와 교통수단, 방문지에서 해야 할 일들과 준비물을 적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최대한 자세히 적었다. 예를 들어, 런던에는 브뤼셀 남역에서 출발하는 유로스타 기차를 타고 5월 9일 11시 57분에 도착한다. 런던에서 숙박하는 날수는 6일이고, 6일 동안 대영박물관, 버킹엄 궁전,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빅벤, 웨스트민스터 궁전, 타워브리지, 자연사 박물관, 다우닝가 10번지, 소호 등을 방문한다. 몬머스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주변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왔다는 햄버거 체인점에서 햄버거와 랍스터도 먹는다. 웨스트앤드에서 뮤지컬도 보고, 일요일에는 유명한 개신교 목사인 찰스 스펄전과 마틴 로이드 존스가 담임했던 웨스터민스터 채플 교회와 워터 비치 침례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 각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회 위치를 파악하고, 예배 시간과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도 기록했다. 주요 전압이 230 ~ 240 볼트이므로 어댑터가 필요하다는 것도 적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을 위해 몬머스 커피와 홍차를 선물로 준비하기로 했다. 런던이면 여행의 4 분의 1 밖에 못 간 것이므로 선물들을 계속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고, 런던에 머무는 동안 항공우편을 통해 선물들을 한국으로 부쳐야 했다. 영국 여행을 위해 준비한 브리트레일패스는 아직 활성화가 안 돼 있었고 런던에서 다음 행선지로 갈 때 역에서 활성화시켜야 했다. 다음 행선지인 스코틀랜드 아일 오브 스카이로 가는 기차는 5월 15일 아침 9시 킹스크로스 역에서 타야 했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전부 기록했다. 어디까지 준비됐는지, 뭘 더 준비해야 하는지가 눈에 들어오자 머릿속도 정리가 됐다. 기록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출국하기 며칠 전까지 열심히 일정표를 채웠는데 끝까지 다 채우지는 못했다. 서유럽을 한 바퀴 돌고 베를린과 바르샤바, 발트 3국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 모스크바에서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야 했는데, 베를린부터의 일정이 비어있었다. 숙소나 교통편은 물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중간에 어느 도시에서 며칠을 묵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저 다 채우고 출발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출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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