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이라니 믿기 싫어요

변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

by nay

오래전부터 아파서 지병처럼 되어버린 것이 하나 있었다. 왼쪽 다리 저림. 사실 저림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고 뭔가 지릿~~ 한 통증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리 저림의 대표적인 이유는 크게 디스크 또는 좌골 신경이 눌려서 생기는 통증, 이렇게 2가지로 본다. 디스크가 있다는 것은 3-4년 전부터 건강 검진할 때 알 고 있었는데, 갑자기 통증이 생기다 보니 이건 아마 좌골 신경통일 거야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열심히 유튜브 검색해서 증상 개선에 좋다는 스트레칭을 안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나아지질 않아서 싱가포르에 있을 때 더 이상 참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도수치료하는 곳에서 몇 달 치료를 받기도 했다. 상태가 호전이 되는 듯했으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늘 은근한 (그래서 더 기분 나쁜) 통증이 있었고, 밤에 자려면 어느 한쪽으로 눕기가 힘든 날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증상은 여전했지만 참으며 지냈다. 참으며 지낼만하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막 아프다가도 괜찮아지고, 일할 때는 그냥저냥 참을만한 증상이었다. 그러니 병원을 생각하다가도 넘어가기 일쑤였다. 괜히 시간을 내기도 싫었다. 그러다 집 주변에 괜찮은 척추 전문 병원이 있다 하여 찾았다. 귀찮음을 이겨낸 힘은 그때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 X-ray를 찍었으나 의사 소견은 이 정도 디스크는 누구나 있는 수준이어서, 일단 물리치료로 받아보고 시작하자는 의견. 딱히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시원하게 디스크 때문이요 라고 했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이유를 모르지만 대증요법으로 하자는 말에 괜히 심사가 틀렸다. 물리치료받고 소염제 먹었더니 좀 낫나 싶었지만 확 좋아진 느낌이 없어 더 이상 치료를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통증이 너무 심해졌다.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곤란하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삶의 질이 심하게 공격받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저림이 심한 날엔 만사 귀찮고 가족들에게 짜증을 많이 내는 나를 발견했다. 좋은 것을 먹으러가도 온통 신경은 다리에 가 있었다. 멋진 풍경에도 감동하기 어려웠다. 가화만사성, 수신제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아직 젊어서, 몸의 노화가 덜해서 참고 지내고 있지만 더 나이 들면 더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병을 키우면 안 될 것 같았다.


병을 키우는 원인 중 하나는 자신의 건강과 몸 상태에 대한 근거 없는 자만심과 자존심이다. 오래전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 결과에 늘 혈압이 높게 나오니 병원에 가서 좀 더 검사를 해보라는 아내의 말을 계속 무시했었다. 검색을 좀 해 보면 '백색 고혈압'이라는 증상이 있다. 평소엔 괜찮아도 병원에 가면 괜히 긴장해서 혈압이 높게 측정되는 것이다. 나도 그럴 거라고 믿고 설득해 왔다. 그러나 100-150을 꾸준히 넘는 수치임에도 아무 근거 없는 내 주장보다는 데이터를 보여주면 아내의 걱정도 덜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24시간 몸에 차고 다니면서 혈압을 측정하는 기계를 대여할 수 있었다. 잠자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하루를 꼬박 혈압 측정기와 함께 지낸 후 검사 결과를 받았다. 이 결과로 아내의 걱정과 의심을 한꺼번에 덜 수 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고혈압.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정확한 데이터였다.


고혈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난 지금 그냥 건강한데 스스로 어떤 병의 환자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며 자만하는 것도 있었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준비가 부족했다. 평생 끊을 수 없다는 약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귀찮음, 몸 상태를 인정할 수 없는 마음. 당시 40대 초반의 일이었다. 마흔이면 아직 쌩쌩할 때라고 굳게 믿었었다. 운동을 열심히는 아니어도 꾸준하게는 해 왔기에 몸 상태에 대한 자신이 있었던 터다. 고혈압을 진단받고 한 달을 꾸준히 운동해 본 후 다시 만나자는 의사의 권고를 충실히 따랐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상태가 달라지면 약을 먹지 않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그 이후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다. 약을 먹으니 혈압이 잘 잡힌다. 이렇게 쉬운 해결을 괜한 내 고집과 아집으로 보내버린 것을 반성했다.


과거에 그런 경험을 했어도 새로운 어떤 증상은 자꾸 가볍게 넘기려고 한다. 병을 인정하지 못하면 더 나아질 좋은 기회와 시간을 놓치는데 말이다. 다시 찾아온 고통에 빨리 정밀 검진을 예약했다. 그런데 예약을 한 다음 날이 되니 거짓말처럼 증상이 많이 줄어들었다! 왜 저를 시험하시나요. 또 한 번 갈등이 찾아왔다. 조금 참으면 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 괜히 검진받아도 별 것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의심, 주말에 시간을 내서 병원을 가야 하는 귀찮음, 그동안 지내오면서 생긴 참는 법 등 유혹의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병 키우기'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나 보다. 내 나이가 이제는 40 보다 50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고 말이다.


MRI 검사를 받아보니 4번-5번 디스크 사이에 신경이 부어 있어서 그게 눌리는 탓에 통증이 오는 것이라 하였다. 원인을 알게 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일단 수술은 아니고 부은 신경을 가라 앉히는 시술로 진행해 보자 하기에 고민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지난 2년 간 혹처럼 달려 있던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결과는 정말 신기하다. 주사를 맞을 때 고통은 좀 심했지만 늘 다리 한쪽에 영향을 주던 아픔이 사라졌다. 100%는 아니지만 많이 줄었다. 이렇게만 해도 삶의 질이 확 좋아지는 것을! 참아왔던 시간이 괜히 멋쩍다. 지금 드는 걱정은 마취과 선생님이 하신 말씀. 왼쪽 아픔이 사라지만 오른쪽이 아파질 수도 있어요. 둘 다 눌렸는데, 왼쪽이 더 심해서 거기만 통증을 느끼는 것이라서요. 그 말을 듣고 움찔했지만 이내 맘 속으로 답은 나왔다.


네. 그렇게 되면 고민하지 않고 시술이나 수술받겠습니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건강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보통 난 아직 젊지, 괜찮겠지 하는 것은 마음뿐이다. 노인들도 '마음만은 청춘이지'하는 걸 웃어 넘겼는데, 이제 내가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과 정신이 성숙해 지는 것과 별개로 자기 상태를 현실보다 좋은 상황으로 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앞서 내가 경험했던 인지 부조화 때문일지 모른다. 나이듦에 대한 인정, 아픔과 노화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선'을 넘는 순간, 진짜 그렇게 되어버린 나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아직 30대 친구들과 하하호호 농담을 따먹는다고 난 아직 신세대(?)라고 생각하지 말지어다. 병이던 일상이던 어떤 본질에 다가가려면 현실 인식과 인정,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개선의 여지를 찾을 수 없다. 몸은 충실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화라는 현상을 진행하고 있다. 후성 유전학(Epigenetics)이란 학문이 있다. 타고 태어난 유전적 형질이 몸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의 노력에 따라 노화의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후성 유전학을 공부하는 미국의 어떤 교수는 스스로를 테스터로 삼아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적절한 식사와 꾸준한 운동으로 관리하니 나이에 비해 엄청 젊은 몸 상태였다. 후성 유전적으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쌍둥이 동생이었는데, 그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의 신체 나이는 형처럼 젊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개선의 여지를 찾을 수 없다. 이미 생긴 병은 후성 유전적으로 열심히 관리한다고 없어져서 병이 없던 상태로 돌아가긴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진행 정도를 늦출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늘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젊은 날을 건강하게 지내려면 정말 있을 때 잘 하자. 있을 때 잘 하려면 변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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